[남미] 10년이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항상 집에 있었다. 그 특별한 일이란 시장을 본다거나 친구를 만난다거나 문화센터를 가는 정도였다.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닌데 항상 집에 있던 엄마가 없으면 그게 특별한 일로 느껴졌다.
내가 본 엄마의 삶은 단조로웠다.
우리를 먹이고, 보살피고, 집안을 돌보느라 온전하게 본인의 삶을 즐기지 못했다. 더욱이 우리 삼 남매는 나이 차이도 꽤 나는지라, 하나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나니 또 하나를 키워야 했고, 둘을 다 키웠나 싶었는데 셋째가 태어났다.
셋째가 중학생이 됐을 무렵, 엄만 스포츠댄스를 배우겠다며 화려한 옷과 신발을 사 왔다. 엄마답지 않은 모습에 일탈을 하려는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말레꼰 해변에 앉아 처음으로 시가를 피웠다.
엄마가 싫어하는 담배 같은 걸 피우다니 나름의 일탈이었다.
바다를 보며 두툼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니 쓰디쓴 시가의 맛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영화에서 처럼 멋지게 피우고 싶었는데 기침만 나왔다. 결국 셋이서 한 대를 피우지 못했다. 동생들은 버리자고 했지만 기념으로 피우다 만 시가를 가방에 넣었다.
“이제 막 살 거야”
엄마의 장례식이 끝난 후 둘째가 말했다.
“죽으면 끝인데 하고 싶은 거 다 할래. 최선을 다하지도 않을 거고 적당히 대충 살래.”
그리곤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손목에 타투를 새기고, 귀에는 피어싱을 착용했다. 그게 전부였다.
막살고 싶었지만 막사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엄마가 아플 때는 엄마 없이는 못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10년째 살아가고 있었다. 막살지는 못해도 엄마 없이는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