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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18. 2023

어느 가족의 기묘한 이야기

앨리슨 벡델, <펀 홈: 가족 희비극>


                                                                                                                          2019. 6. 28. 



슬퍼서 청소를 했다.


곰팡이는 참 독하고, 세제는 더 독하고, 인간은 더 더 독하고. 독한 것들을 상대하느라 진을 뺐다. 곰팡이와 세제로 범벅이 된 물이 돌고 돌아 다시 내 입으로 들어오겠지, 뭐 이런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은,

평소에 잘 하자. 곰팡이가 번식하지 않도록.

그런데 이게 참... 복불복으로 걸려든 아파트의 구조적 문제로 쉽지 않을 뿐더러 내 일상의 초점을 곰팡이에 맞추긴 싫다...는 건 한낱 변명. 그저 '목적/계획에 따른 청소'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서다.


어떤 일을 못하는 이유들은 대체로 핑계에 불과하고, 그 일이 다른 일만큼 중요하지 않게 여겨져서, 저 너머 푸르른 콩밭에 맘이 가 있어서. 물론 성격도 한몫 하겠으나. '슬퍼서' 곰팡이를 제거하고, '즉흥적으로' 책장의 먼지를 닦는 식이니. 그러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사진 한장에 주저앉아 과거회상 따위나 해댄다. 이럴 때의 나는 INFP의 전형 같다. 

(가계부도 소설처럼 써대는 녀자가 용돈기입장을 쓰지 않는다고, 계획적으로 기말고사를 대비하지 않는다고 자기 전까지 목소리를 높였고, 일어나면 침대부터 정리하자, 샴푸 마개는 쓰고 닫아놓자, 아침부터 아이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훗날 꼭 너 같은 딸 키우라는 엄마의 저주가 이뤄졌다. 이런 자아분열의 순간이 찾아와서 슬펐던 건 아니었으나)

오늘처럼 경미한 자기혐오에는 청소 같은 사소한 일이 진실로 도움이 된다. 땀과 함께 감정을 배출한 뒤에서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평상시 모드로 무사복귀되니, 역시 운동과 대청소는 하루치 성취감을 주기에는 더할나위없는 듯. 




하루치 성취감에 힘입어 질질 끌던 <펀 홈>을 끝냈다. 


앨리슨 벡델의 그래픽 노블로 죽기까지 벽장 속에 머물렀던 아버지와 벽장을 기세좋게 열고 나온 딸의 이야기이다.



원제 'Fun Home'은 작가가 아버지가 일하던 장례식장을 불렀던 이름이다. 장의사의 세 자녀들은 장례식장을 놀이터로 관을 놀이기구로 삼고, 쓰러진 유가족의 의식을 되찾게 하는 암모니아약을 갖고 놀며, 시신이 들어온 날에도 거기서 밤을 보낸다. 심지어 시신을 해부하는 현장까지 지켜본다. 아버지의 미심쩍은 죽음 앞에 쓰디쓴 웃음부터 주고받는 그들. 단지 오래 전부터 삶 깊숙이 죽음이 들어와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건조한 관계 때문일 터.


그러니 제목에서부터 냉소가 느껴진다.


그 정체를 숨기려 했으나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단어, '퀴어queer'가 ‘뒤얽힌 가족사’의 중심부에 도사리고, 각각의 일화들은 작가가 제시한 정의들의 예시 같다.

그림과 나레이션은 냉랭하고 씁쓸한 정서를 풍긴다. 하지만 작가가 인용한 문학 텍스트들이 이야기에 깊고 풍성한 빛을 드리운다.

가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장면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보여준다든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피츠제럴드의 자서전과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묘사한다든지, 작가가 커밍아웃하기까지의 과정을 오디세이와 콜레트 자서전으로 보여주고,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율리시즈> 속 아버지가 없는 스티븐과 아들이 없는 블룸의 관계와 대비시킨다.

이런 문학적 단서들을 짚어가며 아버지라는 텍스트를 읽어가고 자신의 역사를 더듬어가는 과정이, 어느 레즈비언 딸의 게이 아버지에 대한 정직하고 독특한 회고담 이상의 것으로 이야기를 승화시킨다.


이 건조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하게 될줄 몰랐다. 표정이랄 게 대체로 없던 아버지의 마지막 '표정' 때문이었다. 팔자주름을 손가락으로 가리니 드러나는 그 순한 얼굴과 자신을 향해 뛰어내리는 딸을 향한 눈빛, 그런 아버지를 그리던 작가의 마음과 그 마음이 너무도 진하게 담겨 있는 마지막 문장에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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