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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Dec 12. 2023

크고 텅 빈 자리

#파스칼메르시어 #페터비에리 #유작 #장편소설 #비채



2023. 7. 8. 흙의 날 독서일기 중에서. 


“톨스토이의 죽음이 두렵다. 만에 하나 그가 죽는다면 내 인생에 크고 텅 빈 자리가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만큼 사랑한 적이 없다.” 
-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p537


이 문장을 간밤의 난데없는 부고를 접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던 건 10시 알람이 때마침 울려서였다. 컬럼 한 편을 읽고서 막 창을 닫으려던 참에 부고 기사 헤드라인을 발견하곤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자 J가 제 방으로 가다 말고 열린 문 새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뭔데?" "돌아가셨어." 놀란 기색으로 누구냐고 물어왔지만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에 더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파스칼 메르시어, 내 인생소설을 써주신 작가님이라고, 듣는 이도 없는데 맥없이 중얼거렸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뭐라 형언하기 힘든 마음이 들었다. 몇 개의 부고 기사를 더 찾아보다가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향년 79세. 6월 27일 타계.


그의 신간 소식에 기뻐하고, <언어의 무게>라는 제목에 설레던, 629페이지라는 분량에 마냥 신이 났을 때에도,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걸 뒤늦게 알았다.


하지만 부고 뉴스를 접한 순간에조차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체호프의 톨스토이를 향한 애정 고백 앞에서 뚝뚝 떨어졌던 건, 마음의 ‘크고 텅 빈 자리’를 체호프의 목소리를 통해 그제서야 실감했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도 그만큼 사랑한 적이 없다고 그처럼 절절하게 고백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떤 소설도 그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만큼 사랑한 적은 없다.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마음이 위태로웠던 어느 날, 내가 떠밀려 가지 않도록 닻이 되어준 책이었다.


애정하는 작가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게 행운이라고, 그들의 신간을 기다리는 설렘은 인생작을 만나는 감격 못지 않게 큰 것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뜬 작가들을 애정했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마음의 빈 자리를,
비어버린 만큼의 상실감을,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작가님의 영혼이 부디 안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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