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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할 수 없는 것

뤽 다르덴, <인간의 일에 대하여>

by islander


2023-08-08-16-34-08-083 (1).jpg #뤽다르덴 #철학에세이 #미행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탄생기이자 '삶과 죽음', '존재와 파괴', '사랑과 구원'에 관한 에세이



2023년 8월 8일의 독서일기 중에서


카프카의 "자기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무언가"는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발견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도록 몰아대는 건 뭘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그녀의 친구가 건넨 답변에서였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하는 그 질문.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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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파괴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했던 걸까. 그걸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 <카프카의 일기>를 샀지만, 이 책에서 언급되었다는 보장도 없고, 장장 944쪽에 달하는 양장본이라 몇번 들척이다 책장에 꽂아만뒀다. 그저 언젠가 얻어걸리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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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가 오늘이었다. 1917년 12월 7일자 일기라는 출처를 세 계절이 지난 뒤에서야 다르덴의 책에서 발견한 것이다.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 책을 읽은 보람이 극대화되었던 순간!




뤽 다르덴의 철학 에세이, <인간의 일에 대하여>를 읽고 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 믿음과 무언가는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개별적 신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카프카)”


카프카가 지칭한 '파괴할 수 없는 것'을 다르덴은 타자의 절대적 사랑으로 얻은 자기애와 삶의 기쁨이라 해석한다. 이때의 자기애는 나르시시스트의 것과는 다르다. 죽음의 공포를 떨치고 삶 속으로 나아가려는 존재, 그런 자기 존재를 향한 기쁨 같은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다르덴에 따르면, "태어난다는 것은 시간 속으로 오는 것", "육체가 되는 것"이며, 죽음을 향하는 불가역적 시간의 고통, 즉 죽는다는 두려움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탄생 후 만나는 타자(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대변되는 타자)의 절대적 사랑은 갓난아기에게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주는데, 이 안전지대 속에서 '죽는다는 두려움'은 점차 '삶의 행복'으로 바뀐다.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는 '파괴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을 자기 안에 품게 된다. 바로 지금 살아 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은 채 주어진 생을 기쁘게 누리며, 타자의 고통에 연민과 고통을 느낄 줄 알고 타인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는 존재가 된다.


카프카는 '파괴할 수 없는 것'이 '개별적 신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된다 말하는데, 다르덴은 그 이유를 이렇게 이해한다.


"그것은 아마도 어른이 되어가는 인간의 눈에, 그를 무한히 사랑했으나 그와 마찬가지로 죽을 운명의 존재인 (...) “어머니”보다 “개별적 신”이 분리와 시간, 죽음에서 그를 더 잘 보호하고 위로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다르덴이 내세운 이 책의 첫 문장이자 정언은 "신은 죽었다"는 것. 그는 신이 죽은 이후의 인간이 어떻게 "신의 위로 없이 살아가려 노력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이 지점에서 카프카와 달라지는 것 같아서 기세 좋게 카프카의 일기를 펼쳤는데...

허탈하게도 다르덴이 인용한 일기들이 모두 빠져 있었다. 완역본이라 알고 있었는데... 룰루 밀러의 친구도 읽었고 다르덴도 읽었다는 그 일기는 도대체 어디에...


어떤 곤궁 속에서도 우리를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존재의 목적이든, 신에 대한 믿음이든, 자기애와 삶의 기쁨이든 간에,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우리 내면 깊이 존재하고 있어 그로 인해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카프카의 일기에서 내가 찾고자 했던 건 그런 메시지였을 것이다.



오래 맘에 두었던 카프카의 문장을 다시 만나 예상치 못한 기쁨을 누렸다. 동떨어져 있던 문장들이 이렇게 우연하게 연결될 때면, 어떤 내적 질서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잡혀가는 것 같다. 한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이 연결 고리는 제법 단단하여 나는 이전에는 다른 카테고리에 속해 있던 세 권의 책을 동시에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다르덴의 책은 8장까지 읽었다. 남은 네 장에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사랑' 아닐까. 그렇게 사랑으로 향하는 예술론으로 마무리될지도. 이 책의 시발점은 그의 영화 속 소년이었으니 말이다. 타자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파괴될 수 없는 무언가'를 지니게 된,

'자전거 탄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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