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Dec 26. 2023

파괴할 수 없는 것

뤽 다르덴, <인간의 일에 대하여>


#뤽다르덴 #철학에세이 #미행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탄생기이자 '삶과 죽음', '존재와 파괴', '사랑과 구원'에 관한 에세이



2023년 8월 8일의 독서일기 중에서


카프카의 "자기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무언가"는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발견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을 계속 나아가도록 몰아대는 건 뭘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그녀의 친구가 건넨 답변에서였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하는 그 질문.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p130)"



카프카는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파괴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했던 걸까. 그걸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 <카프카의 일기>를 샀지만, 이 책에서 언급되었다는 보장도 없고, 장장 944쪽에 달하는 양장본이라 몇번 들척이다 책장에 꽂아만뒀다. 그저 언젠가 얻어걸리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언젠가가 오늘이었다. 1917년 12월 7일자 일기라는 출처를 세 계절이 지난 뒤에서야 다르덴의 책에서 발견한 것이다.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질렀다. 이 책을 읽은 보람이 극대화되었던 순간!




뤽 다르덴의 철학 에세이, <인간의 일에 대하여>를 읽고 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믿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 믿음과 무언가는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개별적 신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카프카)”


카프카가 지칭한 '파괴할 수 없는 것'을 다르덴은 타자의 절대적 사랑으로 얻은 자기애와 삶의 기쁨이라 해석한다. 이때의 자기애는 나르시시스트의 것과는 다르다. 죽음의 공포를 떨치고 삶 속으로 나아가려는 존재, 그런 자기 존재를 향한 기쁨 같은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다르덴에 따르면, "태어난다는 것은 시간 속으로 오는 것", "육체가 되는 것"이며, 죽음을 향하는 불가역적 시간의 고통, 즉 죽는다는 두려움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탄생 후 만나는 타자(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대변되는 타자)의 절대적 사랑은 갓난아기에게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주는데, 이 안전지대 속에서 '죽는다는 두려움'은 점차 '삶의 행복'으로 바뀐다.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아이는 '파괴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을 자기 안에 품게 된다. 바로 지금 살아 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은 채 주어진 생을 기쁘게 누리며, 타자의 고통에 연민과 고통을 느낄 줄 알고 타인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는 존재가 된다.


카프카는 '파괴할 수 없는 것'이 '개별적 신에 대한 믿음'으로 표현된다 말하는데, 다르덴은 그 이유를 이렇게 이해한다.


"그것은 아마도 어른이 되어가는 인간의 눈에, 그를 무한히 사랑했으나 그와 마찬가지로 죽을 운명의 존재인 (...) “어머니”보다 “개별적 신”이 분리와 시간, 죽음에서 그를 더 잘 보호하고 위로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다르덴이 내세운 이 책의 첫 문장이자 정언은 "신은 죽었다"는 것. 그는 신이 죽은 이후의 인간이 어떻게 "신의 위로 없이 살아가려 노력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이 지점에서 카프카와 달라지는 것 같아서 기세 좋게 카프카의 일기를 펼쳤는데... 

허탈하게도 다르덴이 인용한 일기들이 모두 빠져 있었다. 완역본이라 알고 있었는데... 룰루 밀러의 친구도 읽었고 다르덴도 읽었다는 그 일기는 도대체 어디에...


어떤 곤궁 속에서도 우리를 끊임없이 추동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존재의 목적이든, 신에 대한 믿음이든, 자기애와 삶의 기쁨이든 간에,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우리 내면 깊이 존재하고 있어 그로 인해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카프카의 일기에서 내가 찾고자 했던 건 그런 메시지였을 것이다.



오래 맘에 두었던 카프카의 문장을 다시 만나 예상치 못한 기쁨을 누렸다. 동떨어져 있던 문장들이 이렇게 우연하게 연결될 때면, 어떤 내적 질서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잡혀가는 것 같다. 한 문장에 불과할지라도 이 연결 고리는 제법 단단하여 나는 이전에는 다른 카테고리에 속해 있던 세 권의 책을 동시에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다르덴의 책은 8장까지 읽었다. 남은 네 장에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사랑' 아닐까. 그렇게 사랑으로 향하는 예술론으로 마무리될지도. 이 책의 시발점은 그의 영화 속 소년이었으니 말이다. 타자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파괴될 수 없는 무언가'를 지니게 된,

'자전거 탄 소년' 



매거진의 이전글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