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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y 20. 2016

영화에서 질문을 얻고, 책에서 대답을 찾다

<곡성>, 그리고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

중학교 때 한 친구는 삼위일체설이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아서 나를 따라 교회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올해 5학년인 딸아이는 신을 지나치게 인격화시킨 나머지 신의 성정체성과 인종정체성을 헷갈려하면서 신성과 인성의 개념을 마구 뒤섞고 있다. 언젠가 아이가 그려낸 신이 (심지어 그리스신 제우스도 아닌)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느낌이라 무슨 하나님이 이렇냐며 큭큭거렸는데 아이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해서 그 뒤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호흡한 나머지 내 신앙이 내 정체성의 기반인 것은 맞으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에 비하면 그 신앙은 여물지 못했다. 내 믿음은 희끄무레하게 보이기는 하나 손에 잡히지는 않는 연무처럼 가끔 피어오르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그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타고난 기질상 논리적이지 못하고 직관적이며, 인과관계가 분명하고 각 잡힌 세상보다는 우연과 필연이 성기게 짜여 틈새 많은 세상을 깊이 아낀다. 그러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속 깊이 결론은 내려졌던 것이다. 그건 애초부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말하지 못하는 내 빈약한 언어로는 신을 말할 수 없다, 라고.


그렇다 해도 신과 종교에 대해 묻는 딸아이의 요구를 맞닥뜨리면 나 또한 이해가능한 언어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에게


라틴 신학의 아버지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으면 안다"라고 표현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는 것이 아는 것의 출발이다"라고 가르쳤으며, 또 안셀무스는 "믿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라고 (p60)

말하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내가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이것이 내가 받은 대답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실망하고 회의했기 때문이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나는 깊이 의심했고 분노했고 절망했다. (거의) 전 국민이 기적을 바라며 사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 가망 없는 나라를 떠나고 싶었고 기적을 호소하느라 몸과 정신과 삶이 피폐해졌을 부모들을 떠올리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가운데는, 나 같은 쭉정이 신자가 아니라 신실한 기도로 아이를 키웠을 부모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신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다고 울부짖진 않을까. 아니면 그 참혹한 시절도 기도의 힘으로 통과해냈을까.


  구약성경의 '욥기'는 욥이라는 한 정의롭고 신실한 인간에게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비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모든 비극을 맞닥뜨린 인간. 재산과 명예와 가족과 건강과 친구들을 순차적으로 잃고 결국 신에게도 버림받았다고, 이것은 신이 주는 벌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절망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약한 나는 욥기를 읽지 못한다. 읽고 싶지 않다.



  얼마 전에 영화 <곡성>을 보았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탄식이 나왔다. 누가 선인지 악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게 내게는 중요했다. 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도 악이 더 강해서도 아니라 인간이 그저 나약해서였다. 속수무책이었다.


  영화 <곡성>에서 종구(곽도원)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괜찮아, 우리 효진이. 다 꿈이야. 아버지가 다 해결할게." 꿈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해결하지 못했다. 엔딩컷을 보고 일어서는데 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아무리 그 이유를 물어도 그 답을 들을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죽음은 무명이 매섭게 짚어준 종구의 죄처럼 그 원인이 보이며 어떤 죽음은 일광이 심드렁하게 말했듯이 그저 운나쁘게 벌어진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시기와 방식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맞게 될 필연적 소멸. 어느 누구도 그 소멸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시기와 방식만 바뀔 뿐이다. 그걸 굉장히 무참한 방식으로 두시간 삼십분 동안 목도한 것 같다.


영화의 후유증은 꽤 컸다. 영화가 주는 쟝르적 쾌감은 컸으나 영화가 담고 있는 메세지를 아무리 궁굴려봐도 허탈함과 불편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건 어린 시절, 욥기를 처음 읽고 난 뒤의 마음과 비슷했달까.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현혹당하여 의심하고 분노하다 불신하고 절망하는 것밖에는 없는가. 의심과 현혹과 불신이 죄의 미끼이며 그 결과가 참변밖에는 없다면 (영화에서는 왜 하필 내 딸이냐고 절규하는 종구에게 무명은 네 딸의 아비가 의심하는 죄를 저질러서라고 답한다) 우리의 미래는 이미 예정되었다. 의심과 현혹과 불신에서 자유로울 인간이 얼마나 많을까. 그 믿음이 신실하고, 타고난 기질이 강건하다 해도 곧 현실로 닥칠 자식, 아니 온가족이 맞게 될 참혹한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가 있을까. 아, 있었다. 그게 욥이었다. 그리고 욥은 믿음의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 허나 어린 마음에 나는 선한 인간을 악이 시험하도록 놔둔 신에게 화가 났다. 왜냐하면  욥과 같지 못한 나는 악의 손에 놀아나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울부짖으며 결국 신을 의심하고 책망할 것이며 그 죄로서 버려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뒤 의도적으로 욥기를 피했다. 회의하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꼈던 어린애였다. 의심을 하다 보면 "내가 믿는 신은 어떤 신인가"를 묻다가 필연적으로 신의 실재를 묻게 될까 봐 그렇게 불신자가 될까 봐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그건 내가 딛고 선 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르지 않았다.



곡성을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장에서 그 책부터 찾았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나는 많은 질문에 시달렸고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그때 발견한 책이 하나 있었다. <곡성>이 다시 촉발시킨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그리고 누군가의 황망한 죽음을 맞이한 뒤 우리가 맞닥뜨릴 실존적 질문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김용규의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은 타계하기 전 가톨릭 교회의 신부에게 24개의 질문을 써서 보낸다. 이 질문지는 한때 신부들 사이에서 돌았고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질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내놓은 실존적 물음들이다. '신'과 '존재의 근원', '종교', '영혼', '사후 세계' '선과 악' '종교와 과학' '종말' 등에 대해 이른바 '백만장자'는 날카롭게 묻고 있다. 그리고  '신을 이야기하는 철학자' 이용규가 '종교적 관점과 언어'가 아닌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답한다.


어떤 종교의 주장을 그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설명하는 말이나 글은 그 종교의 구성원들에게는 은혜롭다. 하지만 자폐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그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북스럽기 십상이다. 그러나 종교적 담론도 인문학적 관점과 언어로 설명되면 덜 은혜롭긴 해도 거북스러움이 덜하다.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다.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뒤를 이은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토마스모어, 기욤 부데 같은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자신들의 인문학적 작업을 담아낼 고유의 글쓰기 방법을 개발하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 글쓰기의 한 전범으로 내려온 인문주의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일반적 양식이 있다. 비교적 긴 문헌학적 설명으로 글을 시작하여, 개념을 정리하고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수사학적 표현을 집어넣고, 고대 작가들의 고전적 지식을 끌어다 활용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 회장의 질문들에 대해, 되도록 이 방법을 따라 답하고자 한다. (p13)


종교의 교리를 따져 묻던 그 옛날의 친구처럼 이제 본격적으로 신에 대해 묻기 시작한 아이처럼 누군가가 내게 다시 묻는다면 신앙이 여물지 못한 나는 인간의 언어로 답해야 할 것 같다. 먼저 믿으라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신의 언어가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제껏 내가 발견한 인간의 언어 가운데 최선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잠 못 드는 밤이 있다. 악을 처단하고 살아남은 주인공 뒤로 흐릿하게 드리워진 불길한 기운처럼 불안과 두려움이, 근심과 걱정이 내 머리맡을 찾아온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선악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이라면,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심한 사람의 신발 밑창에 언제 깔려 죽을지 모르는 개미와 다를 바 없다면, 우리의 매일의 안녕을 위한 기도가, 정의와 선에 대한 갈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도, 어쩔 도리 없이 기도하게 된다. 한밤중에 깊이 잠든 아이의 작은 머리와 여린 어깨와 마른 등줄기와 햇빛에 여문 손을 쓰다듬고 있으면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람이 너무도 약한 존재처럼 여겨져서 기도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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