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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May 24. 2016

아무것도 아닌 채로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

                                                                                                           illustrated by Iniong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자동차에 부딪혀 몸이 허공으로 치솟던 순간, 머리 속에 그 문장이 떠올랐다. 주위의 풍경들이 한순간에 이지러졌고, 소리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완벽한 단절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고, 생각나지도 않았다. 커다란 캡슐 속으로 머리부터 천천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 라는 문장이 두꺼운 헬맷처럼 내 머리를 감쌌다.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을 때 나는 정신을 잃었다.
     죽지 않았던 것은 그 문장 덕분이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정말 그 문장이 헬맷처럼 내 머리를 감싼 덕분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 때로는 생각의 힘이 몸에다 두꺼운 갑옷을 씌울 수 있다는 것을, 죽지 않으려고 애쓰면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히말라야 산맥의 전설 속 설인처럼 나는 온몸에다 하얀색 석고붕대를 두르고 병원에 누워서 온종일 그 문장을 생각했다... 잠들기 전에는 그 문장을 주문처럼 외웠다. 그렇게 하면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뜰 때마다 살아 있었다.
                                                                                  -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의 첫.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벚꽃이 피자마자 비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이 요즘 내 지갑에서 새는 돈처럼 아깝게만 느껴진다. 제발 좀 오래 붙어 있어라! 

        늦은 아침을 먹고 세탁기를 돌린 뒤 발코니를 쓸었다. 문득 사위가 밝아지는 것 같아서 허리를 펴고 바깥을 봤다. 순식간에 구름이 걷히더니 하늘이 밝아졌다. 간간이 가지 끝이 흔들거렸고 벚꽃이 흩날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빗자루를 내려놨다. 그냥 츄리닝 차림에 모자만 눌러쓰고서 집을 나섰다. 오늘이 아니면 안되는 일들이 있다. 가령, 벚꽃길 걷기. 봄은 짧고 좋은 날은 드물고 꽃은 언제나 금세 진다. 내일부터 다시 비가 내린다 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내 옆을 지나갔다. 그들이나 나나 목적은 산책이었던지라 어느 순간부터는 일정 정도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은 좋았던 시절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한 이가 자신의 전성기는 중 2때였다고 했다. 

       "2학년 때 수영 선수였어. 잘 나갔지, 그때." 

       자의반 타의반 그만뒀다는 말에 누가 이유를 묻자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고만 대답했다. 심각한 말투에 어쩐지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니 아들은 운동 신경이 뭐 그래?" 하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다들 웃음보를 터트렸다. 화제는 육아와 교육과 집값과 노후준비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이제 우리 써줄 데가 마트밖에 더 있겠냐." "거기서도 언니 체력엔 금방 잘릴 걸!" "아놔, 소시적에 공부 좀 했는데, 다 필요없네!" "아이구, 스펙 좋은 젊은 얘들도 취직 못해 안달이에요. 이 아줌마가 현실 감각을 잃으셨어." 왁자지껄 웃고 떠들다가도 침묵이 찾아들곤 했다. 나는 좀 머쓱해져서 더 천천히 걸음을 뗐다. 자칫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꽃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 커피를 쏘겠다며 호탕하게 외치는 게 들렸다. 잠시 뒤 그들은 팔을 앞뒤로 씩씩하게 흔들면서 상가 쪽으로 멀어졌다.  

         나는 카메라 초점을 맞춰보려 했지만 매번 손을 조금씩 떨었고 사진은 흐릿하게만 나왔다. 굵게 진 꽃망울을 보다가 괜히 심술이 났다.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나의 시절'이라 부를 만한 게 오래 전에 끝난 듯했다. 손에 힘마저 풀리는 마당에, 인정!   

        "지금도 작정하고 먹으면 많이 먹는데 이젠 고 다음날엔 아휴.. 어떤 날은 취하는 게 아니라 체한다니까."

        이번에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였고 목소리만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걔랑 일곱 병을 먹은 거야. 그리고 포장마차에서 네 병 또 먹고. 그런데 더이상 못 먹겠는 게, 목에서 술냄새가 나는 거야. 응. 그치. 그래. 소주가 달 게 느껴질 때가 있어. 야, 인마. 그런데 땀 많이 흘리고 먹을 때 진짜 조심해야 해."  

        나는 계속 팔을 후들거리며 벚꽃을 사진에 담으려 애썼다. 남자는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떠드는 것 같았다. 포상휴가차 나온 장정 셋이서 세발낙지와 지리와 새우깡을 벗 삼아 동 터올 때까지 마시던 이야기 끝에 그는 혼잣말하듯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가 좋았지. 그땐 끄덕 없었어..."

        잠시 뒤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어, 사거리 지났냐? 그럼 다 왔네." 

        이윽고 전화를 끊었는지 조용했다. 흘깃 곁눈질해보니 남자는 벚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듯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앞에서 소나타가 속도를 줄이면서 다가오더니 나를 지나쳐 정차했다. 떠들썩한 인삿말이 오가고 차는 떠났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좋았던 그때...가 내겐 언제지? 내가 오롯이 '나'로 존재했을 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가. 그저 아내나 엄마, 딸, 혹은 며느리라는 역할에 불과한 건가. 그 역할을 하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란 말인가. 진짜 나란 뭐길래?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종내는 내게 어떤 여지가 남아 있는지를 묻기에 이르렀다. 지금 벚꽃나무 곁에서 휴대폰을 들고 멍 때리는 내게 어떤 미친 자동차가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p109)."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산다 할지라도 이 문장으로부터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누군가를 불면의 밤으로 인도하고, 괴로워서 술을 찾게 만들고, 직장을 그만두게 하고, 애인과 헤어지게 하고, 결국 

           "무모할 뿐더러 세계의 평화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으며 돈을 벌 수도 없고 심지어 영원히 끝장을 볼 수 없는(p128)" 

  

          그런 일을 벌이게 하는 문장... 

           안타깝게도 언제나 그렇듯 질문들은 또 다른 중차대하고도 현실적인 질문에 떠밀리고 만다. 안 하는 게 무모하고 곧잘 하면 집안 평화에 이득이 되며 잘만 하면 돈을 아낄 수 있는 일이다. 영원히 끝장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같긴 하다만. 게다가 이건 무조건 대답해야만 한다. 

           오늘 저녁은 뭘 해먹지...... 

             흑. 


악기들의 도서관 - 


김중혁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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