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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Apr 26. 2016

헬로 마이 라이프

무라카미 류,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번"

                                                                                          

55세부터 헬로라이프 -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북로드                                                                                                 

  사람은 의외로 쉽게 노숙자로 전락한다. 인도 시게오는 그렇게 생각한다. 6년 전, 근무하던 작은 출판사에서 정리 해고를 당했다. 쉰네 살이었다. 그로부터 4년쯤 지났을 무렵부터 노숙자를 볼 때마다 이상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무리에 끼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불안감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p79)

                                                                   -  무라카미 류의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수록작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번"의 첫                                                                                                                         


             언젠가부터 이런 저런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곤 한다. 고민이라기보다는 거의 망상에 가까운 불안이랄까. 내가 생각의 주인이 아니구나, 싶다. 말하자면 나는 부질없고 의미없는 소음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광장이자 통로이며 때때로 그 소음들이 이미지로 펼쳐지는 것을 꼼짝없이 지켜봐야 하는 유일한 관객이다. 결국 너덜너덜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차라리 안 자고 말지, 책이라도 읽는 게 낫다. 그렇게 오전 4시 22분을 맞이했다. 오늘도. 


            성경을 거의 반만년 만에 꺼내들고 여호수아 1장을 묵상한다. 이런 고백은 친정 엄마가 가장 반가워할 테고 내가 이제껏 드린 그 어떤 생일선물보다 당신을 더 흥분시키시겠지만, "거 봐라, 네가 이제야 철이 드는구나!"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기록으로만 남긴다. 몸에 뿌리박힌 거부반응 같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내게 신앙은 그런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철도 덜 들어서겠지. 어릴 때 그 누구를 상대로도 제대로 한번 '개겨보지' 못하다가 평생을 사춘기처럼 보내는 건가. 반항도 때가 있는 법인데. 하지만 엄마가 반고리관과 달팽이관까지도 굳은살이 배이도록 강조했듯, 말씀이 동앗줄이었다. 이렇게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는 말씀은 놀라우리만치 힘을 발휘한다. 소음을 잠재우고 마음을 다독인다.


           그래. '형체 없는 불안'이란 말을 습관적으로 쓰곤 한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건 아니다. 그건 언제나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오래 신장병을 앓다 죽은 작은 어머니라든가, 어린 두 아이를 남기고 암으로 죽은 고등학교 동창생이라든가, 셋째조카가 태어날 무렵 스쿠버 다이빙 사고로 죽은 큰 사촌 오빠와 대학 졸업과 결혼을 앞두고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동아리 선배라든가, 아니면 뜬금 없는 맥도널드 할머니라든가. 형체 없다,는 말은 현실화 되지 않는다, 를 뜻하는 것이지만, 현실 세계 속 비극은 소설에서처럼 필연적 개연성을 갖고 찾아오는 것 같진 않으므로 현실성을 논해봤자 그건 뫼비우스의 띠 안에서 출구 없이 돌고 돌 뿐이다. 


           최근 들어 부쩍 시달리는 불안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다가 그냥 갈지도 모른다는 거다. 누군가가 의미를 찾는 내게 '너는 참 여전하다'는 표정으로 충고하듯 말했다. 삶은 의미가 없다. 산다는 게 의미 있다. 법륜 스님 말마따나, 저기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가 의미 찾아가며 도토리 줍고 풀 뜯겠냐는 식이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도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냥 사는 거지, 뭐.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별 거 있간. 하는 일이 잘 되냐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 누군가에게는 그냥 웃어주거나 그래도 물어보면 잘 놀고 있다고 하거나 마음이 삐딱해질 때면 아이 열심히 키우고 살림 잘 하고 있다고 냉소적으로 대꾸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럴 때마다 드는 열패감은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태어난 거다. 물 한 잔도 의미를 찾아 마셔야 하며 평생 '왜'를 달고 사는 인간으로 빚어졌다. 그러니 그런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책임 지느라 오늘도 우왕좌왕하며 살았으며 밤이 깊도록 드라마를 찍어대며 궁상을 떨 밖에.


            마음이 그렇게 요동치는 순간, "너와 함께 한다"는 말은 얼마나 듣기 좋은지. 아마 친정엄마가 살기 팍팍한 시절을 견디게 해줬던 것도 그 말이었을 터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세상이 네게 등을 돌려도, 나는 너와 함께 한다. 그 말은 묘하게 내 불안을 형체 없는 것으로 바꿔 버리고서 좀더 냉정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가 근래들어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무력감을 직면하게 한다.     


 


그것은 무력감에 압도되어 뭔가 소중한 것을 방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수단으로서의 분노였다. 분노를 통해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도 없다. 인도 시게오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얕잡아 보지 마라! 그렇게 외치는 대신 후쿠다의 몸을 부축하고 걸어 나갔다. 후쿠다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이제 영영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p146).


            소설에서는 인도 시게오의 오랜 불안이 우여곡절 끝에 노숙자가 되고만 친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친구의 곁을 끝까지 지키면서 자신의 불안을 극복한다. 이 '무력감에 압도되어 소중한 것을 방기하지 않으려는 마지막 수단으로서(p146)' 인도 시게오가 분노를 선택했다면 나는 기도와 독서와 글쓰기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라는 말을 나는 오래 아꼈다. 그 말이 풍기는 초연함이 좋아서였다. 이제는 "희망도 절망도 모두 끌어안고", 라는 말을 더 자주 떠올린다. 그 말이 지닌 근기와 성실함이 내게 절실하다.



                                                                                      

덧. 

           이런 밤에 동행하기에 그닥 좋지 않은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무대에서 곧 퇴장을 앞두고 있는 조연들, 혹은 단역들의 노곤한 낯빛을 맞닥뜨리는 건, 왠지 내 망상을 심화발전시킬 것 같다. 게다가 작가가 누구인가. 무라카미 류가 아니던가. 그에게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말을 기대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또다른 무라카미처럼 양과 쥐와 난쟁이가 춤추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로의 도피처를 마련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데! 


실은 나 역시 불안으로 가득차 있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있고 아직 살아 있지. 맛있는 물도 마실 수 있고. 그리고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다시 하늘을 나는 꿈을 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 후쿠다, 도움을 받은 건 나란다(p167). 


         류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눈시울을 붉히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러므로 이 소설은, 그가 동년배들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인사.


         ˝Hello, (my and you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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