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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un 08. 2016

그 어정쩡한 첫눈의 순간이 지나고

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필사적으로 뛰어내려오며 안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난 그런 기도 안 했어. 그냥 눈이 오게 해달라고만 했단 말야. 그 말이 맞았다. 안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서양 나라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에서처럼, 그리고 목성과 화성과 명왕성에까지 눈이 펑펑 오는 꿈을 꾼 적이 있을 뿐이었다.
  1976년 크리스마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명왕성이란 이름은 천체에서 사라졌고 그리고 화성에 내리는 눈,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그것은 지상에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 은희경 단편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표제작의 끝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 앉아 예전과 달라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Y언니와 S언니의 설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K언니는 손을 무릎에 놓고 시선을 내리 깐 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문득 Y언니가 하던 말을 멈췄다. 언니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 온다."

   우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어두웠다. 시간은 벌써 아홉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도로 건너편에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걷는 게 보였다. 검게 번들거리는 도로에 동그란 빛을 드리우며 차들이 줄지어 오고갔다. 

  "어데?"

  "나도 안 보이는데..."

  "저기 눈 오잖아."

  다들 왜 못 보냐고 혀를 차는 Y언니에게 언니는 노안이라 멀리 있는 게 잘 보이나 보다고 농담을 건넸지만 언니는 웃지 않았고 왜 자신한테만 보이냐고, 진짜 안 보이냐고, 저기 내리지 않냐고 거듭 말했다. 나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갖다댔지만 뭔가 내리는 기색을 느끼지는 못했다. S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 속에선 좀 보인다. 뭐가 내리긴 내리네."

  "우산 안 쓰고 걸어다니는 사람도 있잖아. 진눈깨비인가 본데."

   우리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하던 생각을 멈추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똑같이 중얼거리는 거다. 

   "눈 온다."

   이어지는 침묵. 


   잠시나마 모두를 침묵하게 하는, 

   첫눈의 힘. 


   다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으려다 나는 말을 멈췄다. Y언니와 S언니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말이 탁구공처럼 가볍게 허공을 오갔다. 나는 핑퐁의 어감이 참 핑퐁스럽다는, 그래서 탁구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고, K언니는 여전히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K언니의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언니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나는 자주 묻는 사람이다. 결혼초에는 남편에게 곧잘 묻곤 했다. 내가 그렇게 묻고 싶어지는 순간 남편이 짓고 있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 해독할 수 없는 표정.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편이 첫사랑 따위를 생각할 거라 의심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고, 그저 나란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였다. 당시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내게 생각은 빈 공간을 못견디겠다는 듯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지겹게 리플레이되는 노래소절이라도 머릿속을 채웠다.

   최근에는 그런 질문을 한 기억이 없다. 이제 남편은 생각이 많아졌다. 굳이 묻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예전처럼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에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그런 연배에 접어들고 만 것이다. 빼도박도 못하는 중년. 

    나는 두 언니의 웃음소리에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뗐다.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와중에, 예전과 달라진 세상, 사람, 관계에 대해 설전을 벌이던 두 사람이 소리내어 웃고 있었고 K언니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2015년.                 

   그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젖은 눈이, 내게는 올해의 첫눈이 되고 말았다. 

   첫눈이 소담한 함박눈이라면 좋겠지만, 대개 첫눈은 이런 진눈깨비이거나 싸락눈이거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먼지같은 눈인 것 같다. 금세 사라지거나 곧 비로 바뀌어버리거나. 

   그런 면에서 첫눈은 첫사랑을 닮은 것 같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첫사랑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려왔던 식으로 찾아왔을까? 혹시 첫눈인줄 알았는데 먼지였다거나, 먼지인줄 알았는데 뒤늦게 눈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녹아버린 뒤였다거나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화성에 내린 눈'처럼 지상에 닿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눈.

   그 어정쩡한 첫눈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 눈이 내린다. 

   온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압도적인 눈.   

   물론 처음부터 쏟아붓듯 내리는 첫눈도 존재하겠지만, 첫눈은 '첫'에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서 훗날 생각해 보면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것에 불과할지라도... 

  어쨌거나 "단 하나의 눈송이"로 기억되겠지.   


  덧.  


   1. 이 단편집으로 은희경 작가가 2014년 황순원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은희경 소설 가운데 <새의 선물>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든 책.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 

은희경 지음/문학동네


   2. 첫사랑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 

   내게는 1988년 도봉구 쌍문동에 거주하던 성덕선양 못지 않게 슬픈 사연이 있다. 

   한때 그리도 열렬히 사모했건만... 

   커밍아웃해버릴줄이야. 

    .

    .

    내 첫사랑은,

    WHAM!의 조지 마이클. ㅠ.ㅠ     

아직도 LP로 애장하고 있는 조지 마이클의 싱글 앨범!

 그러고 보니 이 앨범을 선물해준 고교베프는 QUEEN의 프레디 머큐리의 빅팬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긁적...

이게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첫사랑은 아직 살아 있다~!

열살쯤 어린 남친과 함께... ㅠ.ㅠ   

조지 마이클 옹, 부디 님과 함께 오래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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