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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Oct 31. 2017

염소의 맛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래픽 노블


8시 무렵이었다. 


해는 이미 졌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아파트 초입에 들어서면서 속도를 늦췄다. 두 아이가 자동차 앞을 가로질렀다. 헤드라이트가 아이들의 옆모습을 천천히 훑었다. 


고1이나 되었을까.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의 소년이 단발머리 여자애를 등 뒤에서 껴안은 채 걷고 있었다. 둘 다 제법 묵직한 백팩을 메고 있었다. 소년은 여자애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크고 팔다리가 길었음에도 여자애의 불룩한 가방 때문에 걷는 자세가 어정쩡했다. 여자애의 목을 꼭 끌어안았지만 어쩐지 매달려 끌려가는 듯했달까. 여자애는 자신의 목을 그러안은 소년의 팔을 다정하게 잡고 뒤로 몸을 기댄 채 걸음을 옮겼다. 


아, 저 애들을 어쩔 것인가. 비를 맞으면서도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부둥켜안고 싶은 저 마음을. 


내가 사는 데는 마을이라 부를 만한 좁은 곳이었다. 어떤 엄마가 단체카톡방에서 자기 아들의 행방을 물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느네 아들이 지금 00떡볶이에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증빙사진까지 보내는 게 가능한 곳이었다. 심지어 도서관 화장실 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을 정도다. 

<조심해라. 어디든 엄마가 보고 있다.> 

어쨌든 그 아이들을 지나치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런 여유는 내가 당사자들의 엄마가 아니어서 가능한 것이겠지만.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래픽 노블, <염소의 맛>은 인생의 초입에 찾아오는 풋사랑을 수영을 매개로 절묘하게 그려낸다. 


소년에게 염소chlorine의 맛은 사랑의 맛이다. 그 시절에만 맛볼 수 있는 풋사랑의 맛. 대사는 많지 않지만 잘 포착된 시선과 장면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결말은 모호하게 열려 있고 의미심장하면서도 결정적인 장면마저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다. (물속에서 소녀가 소년에게 입모양으로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이 담겨 있어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한다. 안규철의 설치작품 제목처럼 <당신만을 위한 말>이므로. 이 작품의 영어제목은 <Nobody Has to Know>.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장 궁금한 건 은밀한 것, 드러나지 않는 것, 숨겨진 것 들이다. 소녀는 소년에게 뭐라 말했을까.) 

페이지 위로 흐르는 듯한 수려한 선과 에메랄드빛을 보고 있노라니 당장 물빛 가득한 수영장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풋사랑은 이미 잊힌 지 오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틋함 보다는 그저 투명하고 서늘한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질 뿐. 당신은 다를지도 모르겠으나.


 대단한 거지! 어쨌든 니가 뭔가를 이겼다는 거잖아... 난 시합에 완전 쥐약이거든. 나는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최선을 다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p57)
수영은 왜 그만뒀어?
그냥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러면 니 길은 뭔거 같은데?
그건 몰라. 넌?
글쎄... 사실 난 각자 자기 길이 있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어.
무슨 생각해?
이런거 생각해 봤어?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 같은거... 말해봐...
생각 중이야.
얘기해 봐.
포기하기 싫은 것들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목숨까지 바치지는 못할 것 같아.
어떤 거?
아직은 모르겠어.(p82~85)



네... 그 맛에 푹 빠져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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