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Nov 13. 2017

겨울의 눈빛

박솔뫼 소설집


I've always written songs that were confessional, acoustic, wordy - my writing style matches my personality. The music always has to match the mouth it comes out of.
- Camila Cabello


소설이 아니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

다시 말하면, 이야기가 아닌 목소리에 주목하게 하는, 그런 소설을 쓰는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

노래를 들을 때 가사와 멜로디, 또는 거기 실린 감정이 아니라 음색에 집중하게 되는 가수가 있는데, 그런 가수에 비유할 수 있는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박솔뫼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의 소설집, ‘겨울의 눈빛’을 읽고 있다.

나는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 ‘너무의 극장’ 같은 소설을 읽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하는 건 서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화자가 아닌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기에 이기호스럽다거나 황정은스럽다와는 다른 의미로 박솔뫼스러운, 어쩌면 ‘스럽다’는 어미가 불필요한 그냥 박솔뫼 그 자체인 소설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박솔뫼에 대해 말하려 할 때 나는 먼저 그녀의 문체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소설에는 서사적 쾌감이랄 게 없다. 잘 쓰인 만연체만이 줄 수 있는 쾌감도 없다. 하나의 정보가 실린 하나의 절이 그 다음 절로 유기적이고 논리적으로 넘어가며 리드미컬하게 내달리다가 종내는 벌여놓은 것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마침표를 향해 우아하게 낙하할 때, 그럴 때 느끼는 쾌감 같은 것 말이다.


그녀의 문장을 읽을 때면 종종 혼란스럽다. 단어의 흐름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버려 더듬더듬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는 일이 벌어진다. 몇 년 전 처음으로 박솔뫼의 소설을 몇 페이지 읽다가 그만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녀의 소설을 다시, 또 다시 집어드는 걸까.


“사고 이후 부산타워의 운영이 축소되고 무기한 운영 중지가 결정되자 왜인지 자꾸만 그것을 그려대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또 그려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해야 할지 생겨났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되었고 나는 그런 것을 하지 못해 가만히 앉아 부산타워가 어떻게 생겼더라 부산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부산타워라는 말을 던지면 바로 어떤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부산타워를 그리는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보고는 했다.(p15,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


“사고가 난 고리 1호기는 1977년에 지어졌고 이미 지나버린 2007년에 30년으로 설계했던 수명이 다 되어 잠시 운행이 중단되었는데 이런 것은 SF도 아니고 뉴스도 아니고 사실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사건 정도겠지만 1977년이라는 점에 발을 갖다 대보면 1977년이라는 시점은 과학이요 미래요 에너지요 발전이요 개발이요 선진국이요 그것이 만들어낸 밝은 기운 같은 것에 휩싸여 우리가 옛날이라고 그때라고 부르는 과거 전혀 그런 과거 같지가 않았다.(p20, 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  


하지만 위와 같은 문장들을 중얼거려 보면 눈으로 읽을 때와는 다르게 익숙한 리듬이랄지 단어들이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는데, 그제야 이건 글이 아니라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생각은 무엇으로 이뤄졌을까.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문장, 문어체적인 문장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뭔가를 의식하는 순간에 갖게 되는 생각이며 뭔가를 정리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므로 대개의 생각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말의 형태가 아닐까, 말로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각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반복되고 더듬거리기 일쑤며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으나 어쨌든 한줄기로 흐르다가 불현듯 끝나버린다. 그렇게 문장으로 정리되지 못한 채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활자화시키면 이런 형태일 것 같다.

박솔뫼 소설이라는 형태.


일단 목소리에 익숙해지자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력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작가의 목소리에 감응하기 어렵다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식의 문장 구사를 신의 경지로, 예술적으로 끌어올린 작가들이 있다. 박상륭이라는 신이 만든 완벽한 세계, 이승우라는 견고한 건축물과 정영문이라는 거대한 허무의 벽. 이들을 숭상하는 독자들에게 박솔뫼의 문장이 어떻게 느껴질지...

하지만 그녀가 쓰고자 하는 소설과 어울리는 문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젊은 작가의 개성 있는 목소리에 지지를 보내고 싶다.


무엇인가 내년의 계획들 우리가 숫자로 손에 넣은, 넣었다고 우선 믿어보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좀더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가져가보는 계획과 과정 들을 생각하다 왜인지 정말 누군가의 농담처럼 정말로 언젠가는 이 숫자들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고 이미 줄어들고 얇아지고 쪼그라든 지금을 먼 미래는 부러워하고 아쉬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이 밤은 우울해하지 말고 밤을 밝히는 흔들거리는 불빛 같은 것이 되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웃으며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p172,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


매거진의 이전글 염소의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