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
어느 해 저녁 무렵, 가게의 좁은 통로에서 두 남자가 거칠게 말다툼을 하고 있다. 젊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 머리를 싹 다 민 남자가 위협적인 포즈로 서 있는 게 보인다. 아이가 기억하는 장면은 그게 전부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이 다투는 이유가 돈 때문인 것은 아이의 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는지는 알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은 지지 말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보증은 절대 서지 말 것을 강조하며 돈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아버지를 떠올려 보자면, 큰 소리 칠 만한 사람은 남자가 아닌 아버지였다고,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렇게만 생각할 뿐. 그런데도 기억 속에서 위협하는 이는 언제나 대머리 조폭같이 생긴 바로 그 남자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탄은 신의 형상을 따 만들어진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싶었다. 처음 인간에게 보낸 것은 거친 야생동물이었다. 인간은 서로 힘을 모아 야생동물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전염병을 보냈다. 사람들은 기도하기 시작했고, 몇몇의 끈질긴 노력 끝에 병을 고쳐 내었다. 그 후의 시도들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사탄의 마지막 시도는 성공했다. 사탄이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돈”이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 크고 작은 규모의 장사와 여러 사업을 벌이던 아버지, 가게 문을 닫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귀가하던 어머니... 나는 돈의 소중함보다는 무서움을 먼저 깨달았다. 부모를 한숨짓게 만드는 것은 대개 돈이었고, 그 돈은 부모를 아침부터 밤까지 집 밖으로 내몰았다. 그 시절엔 대부분의 삶이 그러했겠지만, 풍족함보다는 부족함이, 윤택함이 아닌 궁상스러움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막내를 낳으러 간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잘 돌보라며 고모가 내 손에 단단히 쥐어주신 돈은 삼백 원이었다. 오십 원이면 떡볶이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지만 그 오십 원이 내게는 없을 때가 많았다. 간식으로 도처에 피어 있던 유채꽃의 줄기를 잘라내어 오물거리던 시절이었다. 기왕이면 그 시절에 돈을 무조건 아끼는 법만이 아니라 현명하게 쓸 수 있는 법도 배웠더라면 좋았겠지만 “아껴야 잘 산다”가 미덕이었고 현명하게 소비하고자 해도 쓸 돈이 없었다.
막상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한 무렵에는, 자잘하게 나가는 돈이 많았다. 작은 구멍으로 새는 물은 눈치채기 어렵다. 어느 순간 그 구멍이 커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치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로 튀어 나가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고 온도를 서서히 높이면 이를 느끼지 못한 채 물 속에서 익어 죽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우리 세대에서 돈을 제대로 버는 방법만이 아니라 현명하게 소비하는 법까지 배운 이는 얼마나 될까.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는 그냥 꿈만 꾸는 걸로 만족하든지, 그게 싫으면 어떻게 해서든 꿈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해 보든지 했겠지요. 그래서 실제로 출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나쁜 길로 빠져든 사람도 있을 거예요. 옛날에는 아주 간단했어요. 방법이야 어쨌든 간에 자력으로 꿈을 이루든가 현 상태에서 포기하든가 둘 중에 하나였잖아요? 그렇지만 요샌 달라요. 꿈을 이루기가 힘들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자니 너무 아쉽고. 그래서 꿈이 이루어졌다는 기분에 그냥 빠져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기 위한 방법이 지금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쇼코의 경우는 그게 우연히 쇼핑이나 여행같이 돈을 쓰는 쪽으로 간 것뿐이에요. 그런 걸 가볍게 도와주었던 게 바로 신용카드와 사채였죠. (p308)"
찰나의 충족감을 위해 사람들은 소비한다. 소비하기 위해 벌고, 벌이보다 넘치는 생활을 해도 당분간은 괜찮다고, 우리들의 신용기관인 은행들은 말한다. 낮은 대출이자를 강조하며 카드의 각종 혜택을 광고한다. 당신은 특별한 고객이며, 특별한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유혹한다. 케이블 TV의 광고주 가운데 으뜸은 “사채업자”요, 그 뒤를 바싹 뒤쫓고 있는 것은 “보험회사”들이 아닌가. 불만족을 자극시켜 사람들을 소비하게 하고, 불안을 가중시켜 보험에 들게 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흥미위주의 단순한 추리소설이라 부를 수 없다. 혹자는 그이를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작가라 명명한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비가 내리는 1992년의 겨울, 도쿄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진 지 이십년이 넘었고,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중세의 흑사병처럼 경계도 없이 지구촌 곳곳으로 번졌다. 속수무책인 상황을 여러 번 넘겼으나 한국경제는 여전히 위기라고 한다.
이야기 속 죽은 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죽.인. 이에 대한 안쓰러움을 갖게 되는 이유도 어쩌면 그이가 그렇게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으나 또 다른 화차[火車]에 탑승해버린 불행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애써 내리려 하지 않고, 어떤 이는 일찌감치 포기한다. 또 어떤 이는 내리고자 발악하나 그 어느 곳에도 출구는 없다. 화차 속의 제 몸을 태우는 불길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달려봤자 우리는 화차 속에서 달릴 뿐.
* 화차: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
* 이 소설과 같이 읽으면 좋을 만한 미야베 미유키의 또 다른 소설 <이유>
제120회(1999년) 나오키 수상작. <화차>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인 신용카드와 대출로 인한 개인파산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이유>는 일본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졌는지를 한 호화 고층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해 사건”을 통해 여과 없이 보여준다.
미야베 월드에 처음 입문하는 이들에게는 <화차>를 <이유>에 앞서 읽을 것을 권한다. 두 이야기 모두 실종사건과 일가족 살해 사건을 통해 당시 일본의 사회적 병폐를 밀도 있게 다뤘으나 이야기 구성과 전개 방식면에서 결이 매우 다른 작품들이다. <이유>는 추리소설의 일반적 형식과는 다른 일종의 르포형식인데다가 이야기 곳곳에 전문적인 설명이 곁들어 있어서 가독성은 <화차>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이 역시 흡인력이 상당하여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내려놓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