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slander Sep 28. 2018

9. 연구자 정희진

경험의 한계를 넘어 도전해야 할 때


  얼마 전 초등학교 선생님인 지인에게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 남녀화장실의 비율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 남학생들 대부분이 열광적으로 수긍했다는 거다.

  이유는?

  “휴게실 화장실에 들르면 아빠보다 엄마가 항상 늦게 나와요.”


  경험이 이토록 중요하다.


  인식은 경험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경험으로 한계지어진다. 따라서 경험을 쌓아야 하지만 쌓은 경험을 다시 극복해야 하는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산 넘어 산인 거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어딜 가든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들고 다녔던 시간이 있었다. 순전히 읽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였다. 하지만 몹시 어려웠다. 진이 빠질 정도였다.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어떤 이슈들은 어찌나 명쾌하게 다루는지 짜릿하기도 했다. 직관적으로 판단내렸던 부분을 그녀가 논리적인 언어로 변호해주는 지점이 많았다. 내가 ‘확신’만 가질 수 있다면 이 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힘들었을까.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는 것, 이것은 삶이 너무 피곤해지는 문제이다.”


  모든 사안을, 여성의 시각으로, 정치적으로,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 그게 익숙하지 않았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들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가의 시선과 분석에 놀라워하면서도 막상 책을 덮고 나면 뭐랄까, 피곤했다.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2014년 어느 가을날 아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이제 그 뉴스 그만 보면 안돼? 마음이 너무 우울해.” 앗차, 했다. 우리 부부는 어쩌다 이런 참사가 벌어졌는지 아이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거의 매일같이 뉴스를 찾아 같이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마음 여린 열살짜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은 죽음들이었고 너무 처참한 죽음들이었다. 어느덧 아이는 자라 중학교에 입학했다. 동아리활동으로 세월호 추모 동영상을 만들었고 교복에 계절이 바뀌도록 추모 배지를 달고 다니며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 사춘기 특유의 거칠고 센 발언들을 서슴치 않는다. 단단해진 거다.


  그런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할 때마다 이렇게 피곤한 이유를.


  내게는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능숙하게 처리할 만한 근력이 키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논할 만한 언어도, 주체적 시선도 획득하지 못했다. 내 여성성이 지닌 문제를 극복하려면, 이게 가장 부끄러운 부분인데, ‘용기’를 내야 한다. 내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여성성을 기반으로 하는데, 그 여성성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결국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밖에 없고 그건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분석,분해,재구성해야하는 지난한 과정이 펼쳐져 있으며, 안그래도 예민하다는 말을 듣는데 더 예민해져야 하고, 단지 갈등을 회피하고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이유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입을 다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주의는 갈등을 조장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사방에서 거친 말들이 들려온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입을 봉쇄해야 유지되는 평화와 관계라면 그건 가짜 평화이고 가짜 관계가 아니겠는가.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페미니즘은 갈등, 분열, 저항이 아닌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라고 믿는다. 부부는 하나라는 말을 나는 이제 다르게 받아들인다. 조한혜정은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삶의 크고 작은 주도권이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있다면, 필연적으로 갈등과 분열, 저항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나의 시각, 하나의 목적, 하나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는 남자와 여자의 각기 다른 리얼리티가 존재하며, 더 나아가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리얼리티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남성이 남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게 남성에게 자연스럽듯이, 여성이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다만, 우리가 외떨어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각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식"해야 한다. 그게 바로 정치가 아니겠는가. 협상과 생존, 공존을 위한 정치.  



  남편과 나는 페미니즘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다르다고 한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어떤 이슈가 불거지면, 남편은 내 의견을 묻고 나는 남편의 의견을 묻는다. 우리는 서로의 경험과 의견에 귀기울인다. 때때로 우리는 크게 놀란다. 몹시 다른 경험을 축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남편도 서로를 뜯어 고칠 마음은 없다. 그건 각자의 몫이다. 나는 그저 나라는 인간을 정치화하는 데만 힘쓰려 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중년링겐에게는 얼마나 버거운지 한숨부터 나온다. (평생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해온 맏딸이기에) 먼저 내 욕망을 극복해야 하고, 순응적 기질을, 오랜 편견과 무지와 언어를 극복해야 한다. (오늘도 아무 생각없이 아이에게 여자애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댔다... 아무 생각 없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나이 들수록 ‘경험’에 의지하게 되는데, 내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무엇보다 내 서사를 나만의 언어로 쓰려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문장이 비문에 오문일 것 같아 자신이 없다.


  하지만, 푸코의 말처럼,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부족하고 서툰 언어로나마 쓰는 수밖에 없다.


  내게는 이 책이 "내 용량, 문제, 위치를 깨닫는 문턱"이 되었다.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