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어떤 문장에 사로잡혀 미동조차 하지 못했던 날이 있었다.
2007년 늦가을이었다. 흥분과 긴장 속에서 면접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몸도 마음도 사납게 덜컹거렸다. 생각은 한 시간 전으로 자꾸만 되돌아갔다. 떠밀려가는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워 창밖에 시선을 묶어두었다. 바람에게 멱살이라도 잡힌 듯 나무들이 휘청거렸고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잎들도 가뭇없이 떨어졌다. 헐벗은 가지들. 발치에서 나뒹구는 마른 잎들. 그 탈피의 과정이 스산하게만 보이지 않았던 건 그 속에서 맹렬하게 응축되고 있을 생의 기운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당시 내가 보고 있던 건 나날이 가난해지는 그들이 아니라 다시 폭발적으로 자신의 푸르름을 쏟아낼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신을 이입했던 건 늦가을이 아닌 한여름의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대책 없이 낙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되지 않는 가능성에 너무 많은 패를 걸었다는 것을. 그 순간 나를 떨게 하는 게 설렘보다는 불안이라는 확신이 들자 더는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 있을 곳을 찾아 몸을 밀치며 나아가는 사람들, 그 틈에서 괴로워하는 자신만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조금씩 자리를 이탈하다가 종내는 버스에서 밀려나다시피 내렸다. 내려야할 곳에 자발적으로 내렸음에도 어쩐지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교보문고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소설 신간 코너로 갔다. 거기서 그 책을 발견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뒷날개에 적힌 문장이 눈을 사로잡았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작가이력을 살폈다. 파스칼 메르시어. 소설 쓰는 언어철학자. 그가 저술한 자유논고, ‘개인 의지의 발견에 대하여.’ 책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서둘러 책을 계산하고 매장 내 카페로 향했다. 당장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 기분이 든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비좁은 카페 한가운데, 때마침 빈자리가 하나 났다. 평소 같았으면 피했을 자리였음에도 나는 안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눈을 감으면 거기 숨죽이고 앉아 있는 내가 보인다. 이윽고 주위의 소음이 멀어지고, 배경이 없어지고, 남은 건 나도, 내가 들고 있던 책도 아닌 문장 하나.
고작 한 문장.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머지는 파묻혀 있다. 여전히. 미지의 영토에.
그런 생각에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애쓰는 일이 열없고 열망이 집착으로 바뀌고 그러다가 허무해진다.
그런 일이 잦아지고 있다.
하지만 메르시어의 문장은, 그날 그랬듯이 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강건하게 붙잡고 있다. 내 선택을 지지하며 내 불안을 위로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내게 묻는다.
이제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나머지가 아주 휘황하게 빛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간 내가 경험한 나는 황폐한 나, 이기적인 나, 사나운 나. 나라는 인간의 바닥을 드러낸 채 그걸 부끄러워하며 걸어왔다. 어쩌면 내 앞에 펼쳐진 게 잡풀과 돌무더기가 무성한 황무지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의 풍경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곳을 용기 있게 가로지를 수 있도록, 누군가의 힘센 문장이 징검돌처럼 동아줄처럼 주어지길, 나와 함께할 벗이 되어주길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나는 이 기도가 응답받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신은 종종 그런 식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작 한 문장에 불과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