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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남 Apr 17. 2022

피해자 다움, 죽어야 인정받는 성폭력

사회의 시선이 만드는 성폭력 피해의 장기 지속

성폭력 가해자와 카톡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한국 사회에서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면, 가해자 측의 변명은 대체로 비슷하다. 상호 합의된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는 카톡 메시지이다. 실제로 그들이 제시하는 대화를 읽어보면(사건과 관계없는 대중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피해 시점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피해 여성은 가해자 남성과 여전히 친근한 말투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잖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가해자의 주장에 동조하며 피해 여성을 꽃뱀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원래 사귀거나 불륜 관계였는데 헤어진 후 무고했다는 것이다.


만약 글을 읽는 당신이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해왔다면, 성폭력이 아닌 경우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본인이 회사를 창업한 경우가 아닌 이상,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상사를 두게 되고, 그들 중 일부는 부당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인격 모독을 하거나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참는다. 만약 그에게 부당한 부분을 조목조목 따졌을 때 돌아올 비난과 괴롭힘, 그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했을 때 돌아올 퇴사 압력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인맥과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내 직무능력과 사생활의 흠결은 어떻게든 찾아내 나를 몰아낼 것이다.


성폭력 피해도 마찬가지다. 직장 내 성폭력의 가해자는 직장 상사, 피해자는 부하 직원이다. 가해자는 회사 내에 피해자에 비해 막강한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피해자는 아직 가해자에게 법적 투쟁을 하겠다고 결심이 확고히 서지 않은 상황에서는 가해자에게 자신이 피해로 인해 매우 불쾌하다는 것을 내색하기 어렵다. 괜히 이전과 다르게 이모티콘을 빼고, ㅎㅎ를 빼고, 넹 대신 네를 쓴다면 상사가 내 기분을 눈치채고 나를 경계하며 업무 상 불이익을 주진 않을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의식적으로 상사의 카톡을 상대해주다 보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친근해 보이는 메시지가 오가는 경우도 발생하고, 이는 이후 피해 사실을 밝히고 투쟁하는 시점에서 피해자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성폭력이 아닌, 동성 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과연 다를까. 남자 상사에게 갑질을 당한 남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는 경우, 피해 사실을 인정받는 과정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주고받은 카톡 메시지가 문제가 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남자들끼리, 혹은 동성 간의 문제에서는 주고받은 친밀한 메시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업무상 위력에 의해 을에게 강요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 내 성폭력 사건도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곧바로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

피해자 입장을 수용한 사람들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 있다. 보통 직장 내 성폭력은 일회성으로 그치기보다는 수 차례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억울하게 성폭력을 당했으면 곧바로 신고하면 되는데 왜 굳이 참으면서 버텼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곧바로 그러한 결심을 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신보다 업계에서 우위에 있는 상사에게 본격적으로 저항할 경우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단순히 신고한다고 단번에 가해자를 몰아내고 처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고가 들어온다 해도,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가해자는 여전히 회사에서 상사로 군림하는 상태이다.


갑자기 피해자를 주요 프로젝트에서 배제하고 한직으로 발령을 내거나, 업무에 갖은 트집을 잡기 시작할 수 있다. 워낙 교묘한 방법으로 빠져나가기에 부당한 압력이라고 따지기도 어렵다. 그러면서 뒤로는 합의를 종용하고, 가족을 찾아가 압박할 것이다. 가해자가 업계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아마 피해자를 같은 업계에 다시는 발 붙일 수 없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는 권위자의 영향력이 큰 예술계 성폭력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로 최종적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받고 가해자를 처벌하기까지는 짧게는 몇 달, 길게는 2~3년이 소요된다. 이 기간 동안 피해자는 만신창이가 되며, 대체로 업계를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성폭력 피해를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대가로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저항할 결심을 곧바로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면서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또 당하면 이제 끝나겠지, 하다가 지속된 괴롭힘에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저항하기로 결심하면, 의심을 받고 대중과 주변 사람들에게 2차 가해를 당한다.


피해자 다움, 피해자의 일상을 가두는 감옥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기대하는 정형화된 모습이 있다. 대략적으로 상상해보자면, 밖에 나오지 않고 틀어박혀 있거나, 나오더라도 매우 의기소침해 있으며 거의 웃지 않을 것이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얼굴은 항상 초췌하고 옷은 대충 되는대로 입고 있을 것이다. 삶의 희망을 잃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성폭력 범죄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가해자를 비난하며 피해자의 인생을 망쳤다고 한다. 강간은 영혼에 대한 살인이라고 한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 몸이 더럽혀졌다고 한다.


성범죄에 대한 이런 표현들은 피해자가 일상을 제대로 누릴 수 없도록 모종의 압력을 행사한다. 피해자이면 화장도 하면 안 되고, 카페에서 친구들과 재밌는 유튜브 콘텐츠를 보며 깔깔 웃는 것도 하면 안 될 것 같다. 뭔가 의욕적으로 하는 일 모든 게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데 이용될 것 같아 두려워진다. 나는 피해자답게 항상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다. 내 몸이 더러워진 것 같아 이제는 남자 친구를 만나면 안 될 것 같다.


가해자들은 사회 구성원 다수와 자신, 그리고 피해자가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인식을 이용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주변인들은 수군거리며 2차 가해를 가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전의 나를 지워야 한다. 이전의 명랑하고 즐겁게 웃고 열심히 살던 나를 내 안에서 죽여야 한다.


성폭력 피해,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물론 강간을 비롯한 성폭력은 심각한 범죄이다. 그런데 왜 피해를 당했다고 피해자가 삶의 희망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폐인처럼 살아야 하는가. 대체 누구 마음대로 피해자의 향후 인생을 결정하는가. 성폭력 피해는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절벽이 아니다. 사회는 피해자들로부터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는 시선을 거둬들여야 한다. 피해자의 평소 생활과 피해 사실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피해자가 당당하게 일상을 영위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습을 잃지 않도록 응원하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성폭력 피해를 당하신 분이 있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다. 당신이 입은 피해는 성을 매개로 이루어진 폭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가해자의 죄가 가볍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범죄는 당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몸은 여전히 깨끗하다. 피해는 피해 그대로만 인식하고 자존감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일상과 가해자에 대한 저항을 구분하여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제 강간을 당했어도 오늘 친구와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당당하게 웃고, 맛있게 파스타를 먹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잊지 않고 쿠폰까지 적립할 수 있어야 한다. 법원에서도 깔끔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판사, 변호사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피해 사실을 의심하는 이유가 되지 않아야 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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