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감각 지도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종이에 세로선을 긋고,
그 왼쪽을 노랗게 칠한다.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종이 위에서 꿈틀거린다.
문일까, 벽일까.
안을 향할까, 밖을 향할까.
어느 동네의 모퉁이일까.
처음엔 그 어느 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 단순한 사실,
그것이 드로잉의 매력이다.
내 기록의 시작은 사진이었다. 렌즈는 늘 일상 가까이에 있었고, 20대와 30대를 지나며 나는 장소를 사진과 글로 붙잡았다. 그 시기의 생각과 감정을 담기에 더없이 적절한 도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계가 보였다. 사진은 장면을 정확히 담지만 그 속의 공기나 온기, 오래 머문 시간은 포착하기 어렵다. 포커스를 어디에 두든, 구도를 어떻게 잡든 끝내 ‘장소의 온전한 느낌’에는 닿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애초부터 사진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장소’가 아닌 ‘사진 속 장소’에 머무는 아이러니가 마음을 오래 무겁게 했다.
사진과 글에서 멀어질수록 새로운 도구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표현의 공백 속에서 ‘글을 쓰고 싶다’,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 오랫동안 눌러온 열망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뜨겁게 유효했다. 그렇게 틀을 깨고 새로운 언어를 찾으려는 의지가 나를 드로잉으로 이끌었다.
드로잉을 시작한 뒤, 몸을 움직여 표현하는 삶의 풍요를 서서히 깨닫고 있다.
첫 선을 긋는 순간부터 마지막 터치를 마무리하는 과정까지, 드로잉은 선택의 연속이다. 대상을 정하고, 무엇을 드러낼지, 무엇을 덜어낼지 고민한다. 그 모든 과정에 생각이 배어든다.
벽돌 하나, 모서리의 디테일, 바닥 재료가 맞닿는 지점까지 관찰하다 보면 질문이 꼬리를 문다.
왜 벽은 저런 형태일까. 이 장소는 왜 생겼을까. 그 디테일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왜 이곳이 좋게 느껴질까. 여기에 어떤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인상적인 장면을 만나면 잔상이 사라지기 전, 직감적으로 포착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직감의 이유를 설명하려 하면 답은 흐려진다.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은 머릿속에 남고, 노트에 물음표로 기록된다. 어떤 것은 드로잉으로, 어떤 것은 글로 풀어낸다.
이제 글과 드로잉은 사진을 대신해 장소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매개체가 되었다.
남은 건 도구를 갈고닦으며 습관을 이어가는 일. 작은 의문이나 단어 하나가 촉매가 되어 글과 드로잉을 거치며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드로잉은 시간과 공간 속에 몰입하게 하고, 내면을 치유하며, 잊힌 열정을 불러낸다. 마음을 ‘공(空)의 세계’로 이끄는 종교 같고, 오래된 불씨를 되살리는 마술 같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것들, 마음에 고이는 감정과 생각을 드로잉과 글로 담으며 나는 나를 알아간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여러 세계를 거쳐 나를 탐험하다가 끝내 전부 밝히지 못한 채 미스터리로 남을지 모른다.
그것도 괜찮다. 어딘가에 또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다가 일상을 반짝이게 할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을 시도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그려본다.
나는 탐험한다.
도시의 실재하는 장소를,
드로잉 속 세계를,
노트 위의 ‘하나의 세계’를.
연필로 살며시 선을 긋는다.
무엇을 만들까...
종이 위에서 점을 찍으며 제자리를 맴돈다.
머릿속 이미지를 좇아
굵고 높은 선을 그어 벽을 세운다.
그 선은 나만의 숨결을 품은 벽이 된다.
벽 네 개를 이어 작은 방을 만들고,
한쪽에는 문을, 맞은편에는 기다란 창을 그려 넣는다.
방 안으로 햇살이 스며들어 눈부시다.
색연필을 들어 노란빛을 얹는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은근한 소리,
햇살에 데워진 먼지 냄새가
방 안 구석구석 번져든다.
창 밖에 자작나무가 있다면
연두 잎이 바람에 살랑이고,
그 뒤로 푸른 하늘이 은은히 펼쳐질 것이다.
구름도 넣어볼까.
흰 파스텔을 부드럽게 문질러
하늘 위에 뭉게구름을 띄운다.
그 속에 사람 하나, ‘나’를 그려 넣는다.
눈을 감고 도시를 그린다.
골목을 걷는 발걸음은 어떤 소리를 낼까.
볕에 데워진 벽돌 냄새, 갓 구운 빵 냄새가 섞여
공기를 타고 흐를까.
나는 어디에 머물며 무엇을 생각할까.
잠시 그림에서 물러나 그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어떤 충동이 꿈틀거린다.
종이 위를 벗어나 벽을 넘고, 지붕 위로 오른다.
다음 장을 펼쳐 지붕선을 이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지붕에서 발을 떼어 허공을 가르며,
손끝으로 나무를 심고
바람에 섞인 흙내와 풀향을 맡으며
골목을 누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 꿈속 풍경으로 달려간다.
거대한 구름이 도시를 덮는다.
빛과 그림자가 춤추는 광장에 내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여기선 무엇이든 가능하다.
나는 나 자신이기도, 상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종이 위의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발견할까.’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드로잉이라는 마법으로 내 안에 숨어 있던 상상의 도시를 짓고,
그 속을 자유롭게 누비며 나는 오늘도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