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감각 지도
작업실, 오후 세 시. 또르르 차를 따른다. 찻잔 속 바닥의 결이 차 안으로 고스란히 스며든다. 잔을 코끝에 가져가 향을 맡는다. 가까이에서, 또 한 걸음 물러서서 향기를 탐색한다.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음미한다. 긴 여운이 가라앉으면, 비로소 차의 세계로 들어선다.
티백 속 마른 찻잎이 서서히 꽃처럼 피어난다. 그 풍경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 같다. 차는 우리를 과거로, 혹은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로 데려간다. 차 한 잔과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다도의 도구와 절차를 간소화해 어디서든 차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티백(tea bag)이다. 차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정성 들여 우려낸 한 잔과 간편하게 즐기는 몇 잔의 차 사이, 우리는 상황에 맞는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건조한 찻잎을 1회 분량 담아 만든 티백은 하나씩 포장되어 일정한 맛을 유지한다. 여기서 ‘백’은 가방, 봉투, 상자처럼 무언가를 담는 하나의 그릇이다.
그릇은 비어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하고, 담기는 내용물에 따라 재료·크기·비율이 달라진다. 내용물에 맞는 그릇을 디자인하는 일은 곧 공간을 다루는 작업이다. 공간이 단단하고 고정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내려놓으면, 봉지 안, 가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종이와 종이 사이, 풀잎 사이, 백팩 안 어디서든 발견된다. 비어 있는 틈, 곧 공간(空間)은 도처에 있다.
찻잎을 따고, 말리고, 가공하는 과정에서부터 티백이라는 그릇, 티포트, 찻잔, 그리고 우리의 입과 몸속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다양한 그릇과 공간을 만난다. 그곳을 채우는 내용물들은 그릇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집 안의 티백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린다. 피라미드형, 평면형, 사각뿔형. 얇은 천 너머 찻잎 알갱이가 색과 향, 실루엣을 드러낸다. 재료는 주로 종이지만, 뜨거운 물 속에서도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 비율의 플라스틱 섬유가 섞인다. 형태가 발전하며 종이 비율은 줄고, 인체에 무해한 플라스틱 섬유 100%를 쓰기도 한다.
티백은 처음엔 주머니 모양의 평면형으로 시작했다. 이후 밑면을 만들어 찻잎 사이 간격을 넓혀 우림을 돕는 형태가 등장했고, 이어 물과 만나는 빈 공간이 넓어진 입체 피라미드형이 나왔다.
티백 한쪽에는 실이 연결되고 끝에는 종이 태그가 매달린다. 찻잔에 걸거나 잔 밖으로 늘어뜨릴 수 있으며, 태그에는 브랜드와 차의 종류가 인쇄되어 정체성을 드러낸다.
찻잎이 물과 만나는 순간, 차를 우려낼 차례다. 끓인 물을 식혀 알맞은 온도로 맞춘다. 티포트에 홍차 티백을 넣고 물을 붓는다. 숨겨져 있던 찻잎의 색이 스르르 물속으로 번진다. 붉게 물드는 순간, 향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 공간을 채운다. 그 향의 경계가 눈에 보인다면 얼마나 흥미로울까.
자줏빛을 띤 붉은 결이 물속을 유영한다. 바짝 마른 찻잎이 생명을 얻은 듯 서서히 몸을 펼친다. 티백에서 번져 나온 기운이 금세 티포트를 진하게 물들인다. 투명한 유리 티포트는 변화무쌍한 그라데이션을 그대로 드러낸다.
차가 충분히 우러난 순간 티백을 꺼내고, 찻잔을 준비한다. 차를 담을 여백이 있는 흰 잔. 은은한 빛깔은 흰색이나 우윳빛 잔에서 더욱 돋보인다. 뜨거운 물로 데운 잔에 차를 따른다. 마침내 차를 음미할 순간이다.
티백의 얇은 천 너머, 부서진 찻잎 속에 작은 숲이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흙내음. 낙엽이 쌓인 가을 산책로가 스친다. 찻잎 향이 코끝을 스칠 때, 나는 이미 그 숲길을 걷고 있다. 이른 새벽, 차밭 위에 맺힌 이슬과 멀리 산허리를 감싼 안개가 겹쳐진다.
뜨거운 물을 또르르 부으면 찻잎이 서서히 붉은 물결로 번진다. 홍차의 빛이 물 위에서 춤추듯 퍼지고, 꽃잎처럼 피어오르며 생명을 얻는다. 숲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는다. 향기는 하루의 피로를 녹이고, 마음은 천천히 숲으로 물든다.
티백의 실과 태그는 작은 문처럼 보인다. 그 문을 열면 찻잎의 세계가 펼쳐진다. 태그 위 글자는 차의 여정을 담은 지도. 손끝으로 더듬으면 인도 케랄라의 차밭, 중국 푸얼의 고산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찻잎이 물에 스며들며 펼치는 색과 향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마법이다. 홍차는 오래된 서재의 오후, 녹차는 초여름 산비탈의 바람, 캐모마일은 해 질 녘의 고요한 정원을 불러온다. 향기가 코끝에서 머릿속으로 스며들면, 나는 그곳에 서 있는 나를 만난다.
잔을 들어 입술에 댄다. 첫 모금이 입 안을 감싸며 온기가 번진다. 그 순간, 상상의 숲이 흔들리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붉은 빛은 짙어지고, 안개는 무거워진다. 쓴맛과 떫은 기운이 바람처럼 스친다. 나는 뒤돌아 숲을 가로질러 나온다.
티백 하나가 단순한 차를 넘어, 내 안의 숨은 상상 세계로 이끈다.
손끝으로 티백을 들어 올리면, 눈앞에 차 숲이 서서히 솟아오른다.
붉은빛과 향기가 뒤섞인 숲 속, 나는 매일 새로운 세계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