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곧 기회, 기쁨 뒤에 슬픔, 이 상반된 단어가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는 건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2025년 올 한 해 가장 기쁨은 나와 아내의 소중한 자녀를 만난 것이다. 1월에 태어난 우리 아들은 밝고 건강한 아이가 되라는 이름답게 지금까지 항상 웃으며 코로나도 이겨내고 건강하게 9개월이 되었다. 기쁨 뒤에 슬픈 소식은? 그렇다. 나는 새로운 병명을 하나 더 장착해 버렸다. 거의 끝판왕 수준의 난치병 타이틀을!
1월 중순 일요일 새벽, 주말 업무를 마친 다음 날이었다. 갑자기 아내가 잠에서 깨며 말했다. “뭔가.. 소변 비슷한 게 샌 거 같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양수였다. 아직 40주가 되지 않은 35주 3일째 밤이었다.
일단 다니던 병원 응급실에 연락하고 허둥지둥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새벽 4시 반 병원 도착, 아내의 상태 확인, 여러 검사 진행, 당직 선생님의 내진 후 “1cm가 열렸네요.”그 사이에도 양수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1월 중순에 아들 두알이를 만났다. 갑작스럽게 세상에 나온 아들을 위한 준비는 미처 하지 못했다. 보통 임신 중에 아기를 집에 들이기 위한 준비 과정이 많다. 어른들이 쓰던 세탁기를 세탁조 클리너를 청소하고, 아기가 사용할 젖병을 미리 세척, 소독하고, 아기 방을 마련하고, 선물 받은 옷가지들을 손세탁해 두고, 할 일이 산더미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여유로운 스타일(?)이라. “이제 하나씩 해볼까?” 하던 찰나에 아들이 먼저 나와버렸다.
제왕절개로 출산을 한 아내는 4박 5일 입원 이후 병원 부속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보낼 예정이었다. 그 사이 나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밀릴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집에 도착해 분류 작업부터 시작했다. 선물 받은 옷들은 손빨래용으로, 아내 친구들에게 받은 옷은 세탁망에, 아기 젖병과 급하게 마트에서 산 젖병 소독솔, 집게는 세척용으로 나눴다. 먼저 드럼 세탁기 세탁조에 전용 클리너를 넣고 돌렸다. 원래는 세탁기를 외부업체에 맡겨 청소하려 했는데 시간이 없어 타협했다. 아내 점심 식사 이후 잠깐 나온 것이라 저녁 전에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내가 제왕절개로 출산해서 보호자가 옆에서 케어를 해줘야 했다. 머릿속으로 최적의 동선을 구상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겨울 내의, 겉싸개, 속싸개, 새 옷 포장을 뜯어 세숫대야에 색깔별로 분류하고 중성세제와 함께 담가뒀다. 주방으로 가서 젖병을 가볍게 세척했다. 가장 큰 냄비에 물을 팔팔 끓이고, 젖병을 넣어 소독했다. 냄비 가장자리에 닿지 않게 조심히. 물론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미리 네이버와 유튜브로 학습했다.
‘세탁조 클리너 성공. 손빨래 검은색, 흰색 완료. 젖병 절반 소독 완료.’
시계를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남은 일은 내일로 미루고 서둘러 병원으로 복귀했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자차로 30분 정도. 서둘러 짐을 챙겨 차에 올랐다. 퇴근 시간대의 길음역 교차로 좌회전 신호에 차들이 계속 끼어들었다. 힘겹게 내 자리를 사수하고 좌회전 후 바로 우회전을 해야 하는데, 아차. 마음이 급했다.
“쾅!”
아기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 나는 생애 첫 교통사고를 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상황을 정리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첫 기억의 짜릿함이라서 그런 거니? 병원 입원실은 보호자 식사가 없어 근처 백화점 푸드코트에 들러 김밥과 샐러드를 사고 아내가 먹고 싶어 하던 빵집에서 당근케이크와 맘모스빵을 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병실에 들어갔다. 사고가 난 지 1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가슴은 계속 뛰고 있었다. 그날 밤, 부산에 사는 외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1달 전 결혼식장에서 만났던 형은 최근 손해사정사 일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아기 태어난 것도 알리고, 겸사겸사 교통사고 조언도 받을 겸 연락을 했다.
"자동차 쪽은 내 전문은 아닌데... 뒤에서 박은 거면 거의 100대 0일 거야."
처음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고장 난 것처럼 뛰던 심장은 현실을 인지한 듯 서서히 안정됐다. 이 사실은 아내가 걱정할까 봐 아직도 비밀 중이다. 이제 곧 자동차 보험 만기인데 가격이 얼마나 올랐을까?
아내는 무사히 4박 5일 입원을 마치고 산후조리원으로 향했다. 코로나가 지난 후라 보호자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나는 2주 중 절반인 1주일을 아내와 함께 조리원에서 보냈다. 하루 두 번 있는 모자동실 시간에 콩만 한 아들과 함께. 나머지 1주일은 회사에 출근했다. 보통 "산후조리원 기간이 남편의 마지막 휴가"라던데, 나는 밀린 집안일 처리와 출퇴근으로 바쁘게 보냈다. 마지막 회후는 집 근처에서 만난 대학 후배 1명. 두부전골 먹으며 신나게 아들 자랑하고 헤어졌다. 2주가 지나고 아들과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중간중간 준비해 둔 덕분에 생각보다 집은 안락하고 쾌적했다. 휴~
2025년부터 배우자 출산 휴가가 10일에서 20일로 늘었다. 100일 기적이 오기 전까지 휴가를 쪼개 쓰며 아내와 육아를 나눴다. 역할 분담은 명확했다. 아내는 아들 케어 위주, 나는 나머지 집안일 전담. 매일의 일과는 이렇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아기 옷은 손빨래를 하고 아기 똥 묻은 옷은 손으로 애벌빨래를 하고 아기를 보다가 잔다. 마치 가사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손을 쓰는 행위가 이어졌다. 젖병 씻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아기 안고 트림시키고. 손가락은 매일 밤 뻐근했지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더 큰 문제는 수면이었다. 평소 교대근무 때문에 수면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매일 7시간은 꼭 자려고 노력하고 저속노화 정희원 교수만큼 수면의 중요성을 믿는다. 하지만 아직 100일 기적 전, 모든 게 무너졌다. 2~3시간마다 아기가 울면서 깬다. 아내와 함께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깬다. 아내가 수유할 때 난 옆에서 쪽잠을 자고, 수유가 끝나면 아기 트림을 10분 이상 한다. 서로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거기에 회사 일로 인한 스트레스도 더해졌다. 평소보다 과도한 집안일, 부족한 수면으로 회복되지 못한 신체. 100일이 다가올 무렵, 내 몸이 서서히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알람이 울린 곳은 손가락이었다.
어느 날부터 손가락이 뻐근하고 우리(?)했다. 오른쪽 검지와 중지 손가락 마디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집안일 많이 해서 그런가 보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증상이 2주 넘게 지속되면서 점점 불편해졌다. 여유가 없어 쿠팡에서 손가락 보호대를 하나 사서 차고 다녔다. 그 당시 주말마다 장모님이 집에 오셔서 집안일을 도와주시고, 반찬을 장만해 주시고, 손주를 돌봐주셨다. 평소 요양보호 일을 하시는 장모님도 손을 많이 쓰셔서 나와 비슷한 증상이 있으셨다. 내 보호대 한 개를 사이좋게 나눠 썼다. 100일의 기적이 오면서 다행히 수면시간은 회복됐다. 하지만 손가락의 회복세는 더뎠다. 여전히 뻐근하고, 마디를 꺾으면 아팠다. 어릴 적 흔히 하던 손가락 마디 '으드득' 소리 내기는 이제 불가능했다.
그 무렵, 아내에게 또 다른 신호가 나타났다.
결혼 이후 공황장애 증상이 생긴 아내와 동네의 난임 전문병원에서 시험관으로 임신을 준비했다. 다행히 한 번의 시도로 성공하였다. 임신 전부터 공황 약을 6개월 정도 감량을 했고 임신 준비를 하면서 단약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잠시 잊고 있던 우울 증상이 출산 후 아기를 돌보면서 이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와 아내 모두 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증상이 점점 선명해졌다. 보통 아이는 울면서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울음을 듣기 힘들어했다.
"아기 울음소리가 비명처럼 들려.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아."
나는 다행히 무딘 편이어서 '아기가 크게 울면 더 건강한 거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기 울음에 기뻐하며 달려갔으니깐. 나완 반대로 아내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다. 모유수유 중이어서 아기에게 젖을 주고 케어하고 교감해야 했는데 다가가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점점 육아 자신감도 떨어지고, 어느 순간 자주 눈물을 흘렸다. 동요를 들으면 슬픈 마음이 들었고, 삶을 사는 것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나의 손가락? 아내의 우울증에 비하면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소소함이었다. 쿠팡 보호대에만 의지하며 버텼다. 당시에는 나의 손가락 통증에 대한 고민은 1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발전할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아내는 예전에 다녔던 정신건강의학과를 다시 내원했다. 보건소 정신상담센터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정기적 상담, 간호사 자택 방문 프로그램... 복합적인 슈퍼 관리에 들어갔다. 그렇게 아들이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 서울 성북구 보건소 정신상담센터 방문 횟수는 10회가 넘어섰고, 간호사 재택 방문 프로그램도 주 1회에서 격주, 그리고 월 1회로 변경될 만큼 아내는 건강을 찾아갔다.
이제 드디어 나를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그동안 잊고 싶었지만 꾸준하게 통증이 있었던 손가락. 드디어 검사할 때가 됐다. 회사 근처 류마티스 내과를 검색했다. 퇴근 후 광화문으로 향했다. 손가락 보호대를 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