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정서, 돌봄을 향하여 -
넋 빠진 대한민국의 2014년이다. 홀로코스트는 계속 되고 있었다. 국가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어야 했던 소중한 목숨들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계절이다. 숱한 넋이 광장에서 내게로 달려드는 오월을 지나 유월의 햇살이 너무 따갑다는 느낌으로 길을 걷는다. 내가 느끼는 세계와 거리에서 만나지는 일상의 모습은 혼란스럽다. 정오를 지난 시간에 하는 외출이 참으로 불편하다. 낯설게 존재의 위기감이 거친 숨과 함께 내부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한 거다. 광장의 소리와 상관없이 아무렇지 않게 또 7월이 열린다.
낯선 도시의 골목길을 돌고 돌아, 다시 빙 두리번거리며 겨우 도착한 그곳은 그 지역의 오래된 책방이었다. 그 책방 역시 시대의 흐름에 걸맞은 채비를 하고 대형서점으로 변신 중이다. 책방의 이름은 옛 것이지만 이미 그 모습은 없다. 주변에는 이런 변신이 일상처럼 일어난다. 우리의 윤택한 삶은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사물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나. 답답한 심정에 불러 세운 너마저 객기 넘치는 격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듯 술이나 한 잔 마시자며 날 더 아프게 한다.
“도대체 이게 나라냐. 시궁창이지. 광화문 네거리에 늘어선 놈들을 봐.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진 거겠지. 소용없어. 내가 광장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닐 때 늘 들었던 그 빨갱이라는 말을 이 나이 먹어도 집안 어른에게서 듣고 있거든. 희망 따위는 없어. 소용없다니까. 바라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힌다. 다 썩었어. 다 죽어야 돼. 나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 나이 먹은 인간들이 다 죽 으면 바뀔 거다. 어떻게 이런 나라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난, 이 나라가 싫다.”
내 기억 속에 너는 여전히 투사로 살아있는데 너는 자꾸 아니라고 한다. 술이나 퍼먹고 소리나 지르면 뭐하냐고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너는 여전히 투쟁하고 있는 거였어. 청년시절 느끼는 사회에서 만나는 낯선 시선들을 지금도 마주해야 하는 고통에 화가 나는 거겠지. 조직의 존립을 위해 국가를 이용하는 패거리 정치, 각종 마피아들이 판을 치며 사람을 가라앉게 한 대한민국이다. 반세기 가까이를 뒷걸음질 치며 광장에서 사람들이 왜, 저항하고 있는 지 기억하면 된다.
정치는 나의 삶을 공동체와 더불어 향유할 수 있도록,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는 행위의 시스템이다. 나쁜 정부의 통치는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대의민주주의 시대에서 오로지 정치인들만이 정치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표에게 맡겨놓고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고대 아테네에 사는 노예와 다름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내게 화를 내는 대상이 많아지면 한국사회에 다른 가능성이 생길 거다.
현재를 살아가는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할 책임감을 기억하고, 포기하지 말자고 토닥거렸지만 네 마음을 알 것 같다. 한국 사회에 국민은 있지만 시민은 없다. 국가는 사람이 없는 교육과 시장을 만들며 언론 장악으로 현실과 타협하게 해왔어.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배우게 만들었다. 많은 신세대들이 자신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지하는 것은 내가 누군가의 자식이고, 어딘가에 속해 있고, 어느 집단에서든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자동적으로 학습되어 '왜?' 라는 말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나의 이해관계로 가장 편한 선택을 하는 것이 현실을 잘 살아가는 방법이란다.
이미지에 불과한 국가 정체성의 개념에 남아있는 나의 삶을 잃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역할은 있어도 주체의 존재감은 없어. 시민으로 존엄성과 의의를 찾아야 해. 내 나라, 나의 정원에 단 한 송이의 장미로 존재감을 뽐내고 싶다. 돌봄의 공동체에서 개별자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어야 한다. 현실을 초월하여 좀 더 고귀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체성, 자존감, 자부심이 중요한데 학벌사회에서 교육 과정을 무시한 채 존재감을 발휘할 방법은 흔하지 않다. 아이들이 학교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공교육의 위기는 공동체를 교묘하게 해체하는 결과를 빚어내어 왔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여기, 한국 사회에 교육은 없었다. 개인의 성공과 이해관계로 개인의 잠재력이나 상상력이 발휘될 가능성을 애초에 원천 봉쇄해 왔지. 아이들은 권위주의의 억압으로 자신의 몸 사리기 급급하고, 획일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성공이란 허울 좋은 허위욕망으로 허덕거려야만 해. 비주체로 사는 것이 덜 두렵게 다가오기에 사육당하는 교육 환경에서 주체로서 철저히 배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결과로 발생하는 일들이 사회에 넘쳐나고 있었지만 국가는 표면적 대응과 감추기, 책임 전가에 급급했다.
청소년의 자살과 학교 폭력, 인권의 부재에서 보이는 권위의 추락에 사람은 없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너와 내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은 동양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마음이었다. 이것이 서양과 다른 문화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떨어져서도 잘 버티어나가는 사람보다는 함께 협력하려는 우리의 공동체 정서이다.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로 강한 내가 약자인 너를 어깨동무하여 나아가는 것이 이 땅의 정서였다. 한국사회에도 우리만의 철학이 가능하다는 ‘우리’라는 시선을 찾아 가는 거 가능하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철학'이 나와 너에게서부터 마련되어 우리의 정서에 맞는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한국인의 기질 중에 가장 큰 특징은 '선함'과 '강인함'이다. 절망적으로 학대 받지 않는 한, 늘 평화롭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들로 고난의 역사를 보내 왔다. 착하고 순박하다가도 위험이 닥치면 무섭게 일어서는 용감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얼핏 바보 같지만 따뜻한 손을 옆 사람에게 내밀어 주는 좋은 사람들이 바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 과거형이 되었다. 수세기를 거쳐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어머니들이 물려준 강인함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근원이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돌봄의 공동체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다.
2014년 대한민국은 사회적 약자들과 검은 바다 속에서 죽어간 영혼들의 원통함을 함께 가슴에 새기는 어머니들의 통곡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족에서 사회로 서로 돌봄의 공동체가 가능한, 인간적인 형상을 지켜내기 위한 철학이 내 안에서 꿈틀거려야 한다. 민주주의가 삶과 공존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고, 정치는 비로소 권력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공론장이 될 테니까.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파괴된 인간성을 딛고 생물학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기대는 삶의 의미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훌쩍 지나면서 '기억하기'를 의식으로 묶어두고 있는 계절이다. 다시 그 여름을 지나 가을로 향하는 마음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한국의 풍습과 잠재력 있는 문화, 다양한 감각에 뛰어들었던 것을 애써 막지 않았던 합리적 이상주의자들의 면모들이 있었다. 이런 한국인의 기질들이 다시 살아날 그 때, 공동체를 위해 쓰이는 자로 나의 필요에 의해 쓰는 자로 살아날 수 있다. 나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내 앞의 너도 아름답게 빛을 내게 될 거다. 내가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너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로 번지게 될 거다. 그래,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수 없는 내가 세상을 품는 이유일 테지.
- 이 글은 <창작수필 2016 가을호>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