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 건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

『안나 카레니나』레빈 VS 안나 - 직관과 사랑

by 이창우


1878년 톨스토이는 작품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의 상상력을 '결혼'으로 전개하고 두 주인공을 각각의 다른 선택으로 이끌어 갔다. 안나와 레빈. 그 시대에 놓인 같은 인간으로 선택이 아닌 여자와 남자의 선택으로 인한 결혼은 결말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세기의 문학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선택으로 빚어지는 결말은 21세기인 지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상상력은 의미가 다르게 작동한다. 자본이 노동을 잠식하고 기득권을 휘두르는 이들의 넘치는 탐욕으로 세상은 달리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겪는 고통을 공감하고 분노의 눈물로 날 선 아침을 맞는 상상력이다. 이런 상상력이 발휘될 수도 없다면 삶은 참으로 공허해질 것이다. 그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 해도 타인의 고통을 느 수 있는 내 안의 힘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귀족들이 생각하는 노동의 의미와는 다른 노동을 통해 생존을 해야만 하는 농노들과의 인식에는 커다란 장벽이 놓여 있다. 현대 사회, 자본에 의해 부여되는 노동의 가치도 모양새만 달리 했을 뿐이다.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과 다를 수 없다. 그럼에도 개인이 놓인 자리에서 대상을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다.



삶의 모든 관계는 인간으로서 발생되는 거였다. 특수한 대상으로서 사랑하거나 연민에 빠지고 분노에 놓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과는 다른 그가 놓인 사회적 위치에 따라 이해관계로 대상들과 맺어 간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은 삶을 향유하는 방식에서 톨스토이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만나며 그가 추구하는 '선(善)'이 나아갈 길을 따르지만 여전히 사회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 사회가 지닌 인습과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한 개인에게 그것은 혁명인 셈인가. 하지만 이성적인 태도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정의라는 것과는 무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도 소설 밖에서 다시 확인하는 계기를 준다. 그런데 그 머리로 아는 것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에 기인하고 있다면, 그 사실 은폐는 국민주권 시대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회 복지를 모든 사람에 대한 '정'이나 '사랑'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임을 이성으로 판단한다. 직관이다. 그 판단에 얽매여 합리적 사고만을 내세운다면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게 없다. 레빈은 돈만으로 해결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서 멀어지려 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생각한 것들을 현재의 삶에 반영하려는 충실한 인물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이해하는 것과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대단히 다른 차원이다. 바로 현실을 직관과 함께 사랑을 담는 것이라 하겠다.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들에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는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톨스토이는 차원이 다른 삶 속에서 추구했던 진실들을 결국에는 다 드러내고 떠난 것인가 싶다. 톨스토이의 '안나'는 사랑만을 도그마로 여긴 이들을 적절하게 비유한다.


한 방향을 향해 내달리는 치명적인 열정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것은 암울한 광기이기도 하다. 특히 한 대상을 향해 내뿜는 선택은 진실을 왜곡하고 만다. 사랑은 결코 하나로 합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이 시대에서 만나는 사회 구조의 악에 의해 선택하는 죽음의 모습들을 보며 차라리 안나의 죽음처럼 자신을 내던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향유를 모독한 행위였으면 싶었다.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 아닐까. 한 개인에게 담아 둔 정지된 시간의 흐름은 그 감정을 결코 바꾸거나 대체할 수는 없는가 보다. 하지만 다른 빛으로 이어져 가는 것도 같다. 감정을 순간적으로 여긴다면 쉽게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자살들은 지독히 이기적이라 치부하기엔 남은 자로서 너무 고통스럽다.


우리의 사회가 내부적으로 변화의 모색이 없다면 삶은 그저 그렇게 사회에 의해 휘둘려 지나갈 뿐이다. 실존이 아닌 실제의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죽음을 만나 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일지라도 가치 있는 일이다. 하나의 사상만으로 사회를, 그 개인을 규정지을 수는 없음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사상에 의미가 있듯이 내가 지향하는 가치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사상들이 명료해진다.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려면 각자가 자기의 길에서 선택하거나 주어진 역할로 활동하는 수밖에 없겠지 싶긴 하다. 그런 마음들을 내 안에 담고 살아가며 내가 너에게, 또다시 누군가에게로,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던 거다.


현대 사회는 내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넘쳐 난다. 그러나 적어도 '앎'으로 사회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을 저항의 희망을 배운다. 우리들의 의식은 자본주의의 시스템에 의해 파편화되었지만 희망은 아주 작은 일들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것이 선(善)의 의미일 것이라고 톨스토이의 레빈은 말을 건넨다. 한 개인이 추구하는 아주 작은 선(善)이 공공의 선으로 날아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아직도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