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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Jan 05. 2024

은폐, 권력, 폭로

숨어있는 스테디셀러 밀레니엄 1.2.3부 / 스티그 라르손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 진입하면서 만나는 각 장의 첫 문장에서 소설이라는 픽션만을 떠올리지 못하는 나는 지독한 독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책 덕후이기에 가능한 몰입이라고 말한다면 작가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밀레니엄 시리즈를 완성하고 출간한 책도 마주할 수 없는 작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소설보다 더 픽션 같다.       


 책이 출간되고 자그마치 10여 년을 넘기고서야 만나 내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삶에서 작동하는 시간이 늘 우회하여 이어진다는 점이다. 빛바랜 채 서가 한 귀퉁이에 꽂혀있던 이 시리즈가 눈부시게 파고드는 순간부터 이틀이 지나고 있다.      

 

 이틀 동안 일상은 변함없이 지나고 다시 책을 여는 순간부터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단계로 진행이 궁금해서 책을 놓을 수 없는 마음은 그리 자주 일어나는 감정은 아니건만. 적절하게 성장하는 나를 만날 이 순간을 기다려준 책이다.     


 증오 범죄와 연결되는 것은 성폭력과 죽음이다. 인류사를 이어 가는 현재까지 변함없이 전달되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이즘'에도 꿋꿋하게 성장하며 더 은밀하게 팔리는 상품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보이는 이 증오를 풀어나가는 일은 문학에서나 또는 영화에서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애칭으로 불리게 되는 '살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를 들여다본다. 일반화된 개인이 되는 과정에는 필수적인 한 가지가 있는데 바로 가족의 침묵이다.     

  

 인류라는 공동체가 만든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집단에서 살아가기 위해 부당함에 침묵하는 것만이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 걸음을 떼는 일이다. 결국, 스스로가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가족이라는 명사는 '나'로서 독립을 방해한다. 그런 가족의 침묵에서 밀레니엄 시리즈는 전개되고 있다.   

   

 인류의 절반 가량이 남자라는 이유로 공기처럼 누리는 기득권은 너무 견고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 조금 더 나은 인류로 방향을 틀 수는 있을까나. 적어도 사회 중심에서 나를 외치는 일이 메아리가 아니라면 좋겠지만 이것마저 장벽에 갇혀 있다.    


 코비드 시대에서 현재까지도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평행선을 달린다. 아무래도 정부는 개인에게 최소한 역할로 이름값을 하는 것에 머물 것이고 가치 부여는 개인의 몫이었다. 통계 자료에서 숫자로 일반화되는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더 많은 숫자에 포함되는 개인이라는 외로움은 곧 상실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명사형으로 존재하는 정의, 진실, 사랑, 희망. 나열하는 동안 슬픔이 밀려온다. 그 슬픔마저 잃어버릴 수 없다는 마음을 다시 새기게 만드는 문학이라는 명사만이 생명의 기운을 전달하나 보다.   

          

 밀레니엄 1부는 스웨덴 대기업의 한 가족에서 시작된 증오로 시작된 범죄를 40년이 지나서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이다. 잡지사 밀레니엄의 기자인 미카엘과 조사원 리스베타의 활약상이 보여준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이다.     


 1부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리스베타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2부는 12살 소녀가 평생을 겪어온 이야기다. 리스베타 역시 그 시작은 가족에서 시작된 폭력이다.

    

 학대와 폭력으로 시작된 생물학적으로만 아버지라는 대상에게 대응한 소녀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정신병자로 전락해 금치산자로 규정된다. 아버지가 만나는 대상인 여자는 창녀로 불리며 인간일 수 없다. 그런 아버지의 과거는 역시 그에게 드리운 소비에트가 있다. 전쟁의 역사가 인류의 기원이 된다는 말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전쟁의 역사에는 남성만이 인간으로 그럴싸한 서사로 태어나 만들어지면서 존재한다.


 20세기를 주도한 세력은 국가이고 개인은 가상의 권력기구인 국가의 도구로 쓰일 뿐이다. 그 사실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그 틀을 깬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린 여전히 국가를 벗어나 개인으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으니까.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가의 역할에 기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필요에 의한 개인의 선택을 그나마 가까스로 상상할 수 있나 보다.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이기에 국가가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 남용을 허락한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참고로 권력 남용의 예에서 배우는 교훈이 언제나 유효한 것인지도 사실 잘 모른다.     


 다만 한 개인이 사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 너머에 있는 삶이기도 하다. 결국 덜 불편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감시하고 저항의 길을 걷는 것에 담담해질 필요가 있다.      

 

 담담하게 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이 책의 주인공 리스베타) 이렇게 처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 허구조차 진실을 담을 수 없는 경우의 수는 넘치니까. 보이는 것은 전체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인류가 만든 문명사회.     


 밀레니엄 시리즈 3부 『벌집을 발로 찬 소녀』 는 그 모든 것의 폭로이다. 폭로한다는 것은 이 책의 제목처럼 벌집을 발로 찬 후를 상상하면 된다. 한 개인의 목숨을 담보로 벌집에서 튀어나온 그 많은 벌들이 내리꽂는 벌침을 맞아야만 한다.       


 리스베타가 12살 이후를 버티어낸 것은 분노의 힘에서 비롯된 용기다. 그 용기로 얻은 자유, 그 자유를 누리기까지 책임은 미카엘이라는 저널리스트와 연결될 수 있는 정의감일 수 있다.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마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시작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리스베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 개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자유이다.     

   

 분노와 용기, 자유와 책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인간이 가진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결국에는 같은 의미로.     


 국가를 불신하는 개인이 주체로 살아가는 데 또 다른 개인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둘이면 하나의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대와 나, 둘로서 충분한 세상은 언제나 가능하다.     

  

 리스베타와 미카엘이 벌집을 쑤시고 그 벌침에서 살아날 수 있기까지. 한 개인을 그대로 바라볼 단 한 명이면 충분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가. 대상을 향한 신뢰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리스베타의 정의는 이루어지기는 했다. 필요에 의한 사람 관계만을 유지하려 하던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대상화된 여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한 걸음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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