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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우 Dec 21. 2023

그대 사랑을 위하여

『여성 학교 』 이리스 라디쉬


 남성은 배워야 하고 여성은 되돌아봐야 한다.
         

 책의 부제를 읽고 내게 질문을 던진다. 각 장마다 펼쳐지는 이야기는 현대화에 별일 없이 살아가는 우리를 만나게 한다. 책이 출간한 시기에서 십여 년을 훌쩍 지난 현재에 더 열렬하게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직업을 선택할지 아이를 낳을 것인지 깊이 고민하게 하는 가족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고뇌가 더 가까이 전해진다. 가족 구성이 절대적일 수 없는 시대임에도 성년 어느 시기에는 마주하는 고뇌이기도 하다.     


 책은 독일 사회를 이야기하지만 한국 사회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들도 잊지 않았다. 번역자의 따뜻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독일이니까, 한국과 다르다는 이유로 선입견을 가질 염려를 조금은 덜도록 한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어느 나라이건 결혼과 육아 문제는 현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회 변화를 위한 역사에서 누군가 희생으로 진보를 말하던 여러 사건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감정은 늘 이성을 압도한다.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를 달고 달리는 수레바퀴에 흐름을 막을 수 없는 것인지 막으려 하지 않는 것인지. 우리는 아이 없는 세상에서도 행복이란 말을 할 수 있을지. 물론 아이 없이도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행복감을 만날 수 있다.    

 

  영웅이라 일컫는 사람이 이 시대에 여전히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일과 영웅 탄생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 아우성이 뒤섞이는 시대이다. 인류는 영웅 없이 보통 사람들로 이어져 온 것인데도 보통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되어 후세에게 전달되기도 어렵다.       


  화생물학이란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인간 중심 사회이기에 가능한 가족 공동체라는 발상일지 모른다. 최근 접한 진화생물학자의 긴 편지 형식 소설 '마야'를 읽게 되었는데 그 학자조차 가족이 해체된 이유가 아이를 잃고 나서였다.     

  

 누군가는 가족이 필요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거부하기도 한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절대적이지 않다. 거의 모든 것들이 현대화라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진행되는데 가족만큼은 현대화하지 않는 게 갈등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아이의 탄생으로 겪어야만 하는 육아 시기 어려움과 그 시기에 만난 찰나에 기쁨이 평생을 지탱하는데 적잖은 위로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이. 저자가 서문에서 전하는 간절함은 이렇다.  

     


일과 아이, 사랑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세계를 위하여 더 이상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을 바라봐야 한다.      

    

 

 저자는 남성 중심 가부장 제도와 페미니즘이 놓친 아이와 엄마라는 위치의 여성 문제도 비판하고 있다. 자기 결정으로 임신과 출산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보호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역할은 더없이 중요한 시대이다. 혈연만을 고집하는 가족은 더는 권력이 되기 힘드니까.

     

 다양한 가족 공동체가 우리 사랑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는 희망을 이 책에서 만나면서 현재를 돌아보면 막연하기만 하다. 책 제목이 한정된 성을 지목하고는 있지만 그 제목에서 대표성을 엿본다. 호모 사피엔스는 남성만으로 결코 이어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추상적 가족 담론은 아무 소용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에게 진실은 항상 구체적이기에 실제 가족생활에 두 발을 디뎌야 할 때는 이미 시작되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사회복지 수준이 아무리 높아졌다고 해도 맞벌이 가정에는 1차적 체험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짧은 유년기를 가족은 더 이상 공동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과 서로의 체험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저자는 이런 점들을 말하면서 가족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말한다.      


 남성의 행동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동안 가족공동체에서 자리한 여성의 자리를 남성이 똑같이 자리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할까.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라는 표현이 결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언제쯤 알아차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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