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ing Rum
자메이카 럼을 처음 접했을 때보다, Hampden HLCF를 처음 마셨을 때의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과숙해서 까맣게 변한 바나나의 뭉근한 단내, 파인애플의 시큼한 향이 뒤섞여 여름철 길거리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를 지나칠 때 맡았던 냄새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론 그보다는 향기로웠지만, 첫인상은 꽤나 낯설었다.
왜 자메이카 럼은 유난히 낯설고도 은근히 끌어당기는 향을 낼 수 있는걸까?
위스키의 경우, 전체 향미 중 절반 이상이 숙성 단계에서 형성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메이카 럼은 다르다. 이 술의 향미는 대부분 발효 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
발효는 단순히 알코올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어떤 재료를 쓰고, 어떤 환경에서 얼마나 오래 발효시키는지에 따라 술의 특성 전반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자메이카 럼은 무엇을, 어떻게 발효시키길래 그토록 개성 강한 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우선, 위스키와 자메이카 럼의 원재료부터 비교해보자.
위스키는 보리를 포함한 곡물을 사용한다. 발효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선 곡물 속 전분을 당으로 바꾸기 위해 당화(mashing)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자메이카 럼은 주로 당밀(molasses)을 사용하기 때문에, 별도의 당화 없이 바로 발효가 가능하다. 당밀은 사탕수수나 사탕무를 설탕으로 가공할 때 부수적으로 나오는 진득한 시럽이기에, 이미 그 자체로도 발효가 시작되기 위한 당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자, 이 두 술은 이제 발효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위스키의 발효는 대부분 Saccharomyces cerevisiae라는 배양 효모를 사용해 진행된다. 덕분에 빠르게 당을 분해하고, 높은 알코올 농도에서도 견디며, 결과도 예측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위스키 증류소는 외부 미생물의 침입을 오염으로 간주하고 철저히 차단한다.
하지만 자메이카 럼은 정반대다. 발효 환경을 일부러 열어두고, 야생 효모와 박테리아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심지어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햄든(Hampden), 롱폰드(Long pond), 워시팍(Worthy park) 등 자메이카 럼 증류소들은 뚜껑 없는 나무 발효통(open-top wooden vats)에서 발효를 진행한다. 이 구조는 공기 중 미생물은 물론, 설비 표면, 사탕수수 원료 등에 존재하는 야생 효모(wild yeast)와 박테리아가 자연스럽게 mash에 유입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햄든 증류소에서는 발효통을 일부러 청소하지 않기도 한다. 이 통 자체가 수십 년간 유지된 미생물 생태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자메이카 럼의 발효 과정은 철저히 미생물 생태계에 기반한다. 증류소마다 고유하게 자리잡은 야생효모와 박테리아는 고유한 향미 프로파일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다. 야생효모는 공기 중이나 원료 자체에서 유입되며, 다양한 종들이 함께 작용한다. 이들은 발효 속도는 느릴 수 있지만, 보다 복잡하고 개성있는 방향족 화합물을 생성하는 데 기여한다.
한편, 박테리아는 발효 중에 생성되는 향을 한층 더 강하고 독특하게 만든다. 주요한 균종으로는: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 젖산 생성
클로스트리디움(Clostridium): 부티르산, 카프로산 생성
아세토박터(Acetobacter): 초산 생성
발음도 어려운 이들이 생성하는 유기산(organic acids)은 발효액 내의 알코올과 반응해 에스테르(ester)를 만든다. 이는 자메이카 럼에서 흔히 묘사되는 익은 바나나, 본드, 페인트 같은 향의 근원이 된다.
이러한 미생물 환경은 증류소에서 투입하는 아래 세가지의 발효 첨가물로 더욱 강화된다.
던더(dunder)는 증류를 마친 후 증류기 바닥에 남아있는 액체다. 자메이카에서는 이 던더를 탱크에 담아 며칠 이상 자연 발효시키며, 그 사이 야생 효모와 박테리아가 작용해 다량의 유기산과 에스테르, 휘발성 지방산 등을 만들어낸다. 발효된 던더는 다음 럼 발효 배치(batch)에 다시 사용된다. 물 대신 던더를 넣으면 발효액에 풍부한 유기산이 더해지는데, 이 유기산은 발효 도중 생성되는 알코올과 반응해 다채로운 에스테르를 만들어낸다. 단순히 물만 썼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강한 향을 내는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방식이 자메이카에만 있는 독특한 전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버번 위스키도 사워 매쉬(sour mash, 또는 setback, backset) 방식으로 이전 배치에서 남은 워시(wash)를 새 발효에 일부 섞는다. 목적은 다르지만, 두 방식 모두 발효 환경을 조절하고 일정한 미생물 생태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단, 버번은 일관성과 품질 안정이 목적이라면, 자메이카 럼은 강렬하고 개성 있는 향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둔다.
자메이카 럼 발효에는 일반적인 물 대신, 산으로 가득한 액체들이 동원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탕수수 발효산(cane acid)이다. 이름만 보면 고급 식초 같지만, 실상은 훨씬 투박하고 날것이다. 이 식초는 사탕수수 주스를 발효시켜 만든 산성액으로, 여기에 던더와 스키밍(skimming)이라 불리는 끓는 주스 표면의 거품까지 더해져 만들어진다.이렇게 만들어진 cane acid는 강한 초산과 야생 미생물을 그대로 품고 있다. 이 액체는 단순히 산도만 올려주는게 아니라 발효액에 유기산을 추가해 발효 중 에스테르 형성을 촉진시킨다. 또한 사탕수수 줄기에서 온 야생 효모와 박테리아가 함께 섞여있기 때문에, 증류소 고유의 미생물 생태계를 강화시킨다. 정제된 깔끔함 대신, 살아 있는 야생의 복잡성을 택한 것이다.
먹(muck)은 자메이카 럼의 하이 에스테르(high ester) 풍미를 완성하는 비장의 재료다. 죽은 효모, 당밀 찌꺼기, 발효조 바닥의 슬러지를 따로 모아 박테리아로 자연 발효시키면 부티르산, 이소부티르산, 프로피온산 같은 강렬한 유기산이 생성된다. 냄새만 놓고 보면 상한 버터와 썩은 치즈, 구토까지 연상될 만큼 고약하지만, 정작 술 맛은 이 냄새에서 시작된다.
먹은 발효가 끝난 워시에 소량만 첨가되지만, 그 효과는 강력하다. 부티르산, 프로피온산 등 다양한 유기산이 알코올과 반응해 에스테르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 파인애플, 바나나, 망고 체리 같은 복합적인 열대 과일 향이 겹겹이 얹힌다.
자메이카 럼의 발효는 길다. Hampden이나 Long Pond 같은 증류소에서는 보통 10일에서 3주까지 진행된다. 위스키가 대개 2~3일, 길어도 5일 안팎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메이카 럼의 발효 시간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이처럼 발효 기간이 길어지면, 효모뿐 아니라 다양한 박테리아도 점차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초반에는 효모가 당을 분해해 알코올을 만들고, 그 이후엔 박테리아가 유기산을 생성한다. 이 유기산은 알코올과 반응해 다양한 에스테르를 만들어내고, 이는 자메이카 럼 특유의 향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다.
앞서 설명한 던더, 먹, 사탕수수 발효산들도 이 발효 환경을 더 복잡하고 산성적으로 만든다. 덕분에 박테리아는 더 많은 유기산을 만들 수 있고, 이는 곧 향의 잠재력이 커진다는 의미다.
자메이카 럼의 향은 발효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통제된 환경 대신 열려 있는 발효조, 효모와 박테리아가 함께 만드는 유기산, 그리고 던더와 먹 같은 재료들이 그 향의 기반이 된다. 처음 Hampden에서 느꼈던 낯선 향도 결국 이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