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보람 Dec 22. 2022

지나간 첫사랑을 9시 뉴스에서 만난다면

우연을 바랄 수 있을까


  2021년 10월의 어느 날,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 들렀다. 그때의 나는 루미큐브(보드게임)에 열심이었고, 가족들은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길게 누워 루미큐브의 이런저런 숫자 조합을 구상하고 있었다. 뉴스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이었다. 고개를 들고 벌떡 일어나 뉴스 속 말하는 사람의 얼굴과 자막을 확인했다. 그 사람이다. 갑자기 핸드폰이 바닥에 쾅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그때서야 내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이다.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났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름과 목소리로, 그냥 느낌이 그랬다. 맞는 것 같지만 확실하게 하자. 이제는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인스타그램에 그 사람의 이름을 입력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뜬다. 일일이 다 확인할 수 없다. 구글을 켜고 그 사람의 이름과, 뉴스에서 자막으로 나왔던 그의 직장을 입력했다. 페이스북이 뜬다.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의 활동을 보여주는 페이스북이다.



   스물두 살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계절학기 수업이었고 과목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 다 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경영학부 수업에서 만났다. 나는 절대평가라는 이유만으로 경영학부 외국인 교수들의 원어 수업을 자주 들었다. 점수도 대체로 잘 받았다. 수업부터 시작해서 발표까지 모두 영어라 손이 아프도록 필기를 해야 했지만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점수도 잘 받고 공부도 하고, 이 정도면 일석 이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이득이었다. 경영학부 수업의 꽃은 언제나 팀 프로젝트다. 그 수업도 학생들이 알아서 팀을 구성해야 했고, 교탁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내 근처에 있던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저랑 같은 조 하실래요?”


   그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팀원을 구할 때 먼저 말을 거는 게 내 일상이었다. 같은 팀으로써 선호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나는, 아무도 선뜻 팀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네”


  승낙을 받았다. 그럼 됐다. 내일 수업에서 만나기를 기약하고 오늘은 안녕. 계절학기 3학점 수업은 주 5일, 3주간 하루 3시간씩 수업이 진행된다. 즉, 같은 팀원을 15일 동안 매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만난 다른 팀원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는 따로 팀 프로젝트를 위해 시간을 내지 않아도 준비할 수 있도록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낼 수 있게 해 줬다. 나는 무슨 이유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 그때도 몰랐던 것 같은데 지금도 모르겠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나, 그냥 속절없이 빠져드는 거지. 아무튼 나는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그를 무작정 따라나갔다. 평소에 나답지 않게 충동적이었다. 복도에서 그를 발견하곤 던지듯 말을 꺼냈다.

   


“저, 혹시 번호 좀…”


  나는 두 손으로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분명 뭘 잘못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영혼이 바닥 밑으로 빠져나가 지각과 맨틀을 뚫고 내핵에 스며드는 느낌.     


“네?”


  정수기 앞에서 텀블러에 물을 받고 있던 그가 돌아봤다. 이번에는 진짜 놀란 것 같았다.   

  

“같은 조인데 번호도 몰라서요”


  또 멋없는 한 마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내치지 않고 자신의 번호를 찍어 다시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 말만 하고 부리나케 도망갔던 것 같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번호를 받았으니, 연락을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카톡이었다. 아는 것도 없는데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발바닥에서부터 끌어온 용기를 손 끝에 모아 같이 밥을 먹자며 불러냈다. 박새별의 노래 '그대는 아는지'에 그때 내가 했던 바보 같은 일들이 그대로 나온다.



‘뜬금없는 날씨 얘기, 괜한 안부를 묻고, 또 하루종일 네 생각을 했지’


  그땐 나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단 약속은 잡았는데, 뭘 해야 할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식사 메뉴는 내가 정해야 하나? 밥을 먹었으면 카페를 가야 하나? 밥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평소에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내가 이 분위기를 다 이끌어갈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중 희망적인 상상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약속 장소에 나온 그 사람은, 예상한 대로 수동적이었다. 식사는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떡볶이집에서, 걱정 그대로 내가 모든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식사 후 카페를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뒤로는 따로 만나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없다. 하지만 소득은 있었다. 그가 다니고 있던 학교 인근의 교회 이야기를 듣고, 나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일요일 오후에 외국인 학생들이 참석하는 영어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나는 이미 일요일 오전에 다른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신앙도 믿음도 없는 내가 갑자기, 또 충동적으로, 교회를 마치고 또 교회에 가게 되었다. 사실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그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지금은 아니지만 나를 만나다 보면 내가 좋아지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땐 그게 가능했다.  


   

  여전히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나보다 세 살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학교 근처의 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학교의 소재지가 아닌 타지 출신이었다. 어딘지는 모르겠다. 그는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영어 실력도 뛰어났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외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에티오피아, 말레이시아 등 국적도 다양했다.



  한 6개월은 교회에 열심히 나갔던 것 같다. 그동안 또 꾸준히 카톡으로 ‘뜬금없는 날씨 얘기, 괜한 안부를 묻고, 또 하루종일 네 생각을 하는’ 바보 같은 짓을 반복했다. 처음엔 호기로웠지만 갈수록 자존심은 곤두박질쳤다. 그는 늘 외국인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인 친구들보다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때 그는 더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나를 위한 틈은 없어 보였다. 처음엔 나도 외국인 친구들과 친해져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노력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한국인과도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데 외국인은 오죽할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서 오래된 남자친구가 있는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동안 그와 나눴던 카톡을 보여주고 가능성을 물었다. 언니는 단호했다.



그 사람은 너 안 좋아해.

   


   … 아는데, 나도 알고 있는데 그 말을 실제로 들으니 정말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해서 당시 유행하던 연인 간의 카톡을 분석해 누가 더 좋아하는지 알려준다는 어플을 설치하고 분석도 해 봤다. 결과는 짐작을 확신으로 바꿨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결국 꺾였고,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교회에 가지 않은지 한 달쯤 됐을 때 그에게 카톡이 왔다. 처음으로 그가 내게 먼저 카톡을 보낸 날이었다. 나는 그냥 대충 둘러댔던 것 같다. 마음은 여전히 쓰라렸지만 시간은 감정을 흐리게 한다. 살갗이 벗겨진 상처엔 새로운 기억이 겹겹이 쌓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유일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급하게 자란 키를 제외하곤 모든 것이 느리고 더뎠다. 나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보다 천천히 성장을 거듭했다. 나 자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던 그때, 불현듯 눈앞에 나타난 그 사람은 전혀 몰랐던 마음을 느끼게 했다. 이제는 나도, 그 사람도 처음 만났던 그 지역에 살지 않는다. 내가 마주한 변화들과 익숙해지는 동안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를 넘어 아랍어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힘껏 열고 있다. 이 글을 절대 확인할 리 없는 그에게, 멀리서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I will giveyou(기부) my hear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