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시간 있으시면 커피나 하자 말할 수가 없네.
커피를 싫어하면, 쌍화차를 좋아하면 어떡해?
- 브로콜리 너마저 <두근두근>
내가 아는 한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말하는 ‘커피’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뜻한다. 커피를 주문할 때 “따뜻한 커피 한 잔 주세요”라는 말은 대개 뜨거운 물에 에스프레소 샷을 섞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보편적인 음료’인 아메리카노를, 그리고 에스프레소 샷이 들어간 커피류의 음료를 마시지 않는다. 카페인으로 인 한 두근거림과 함께 오는 어지러움을 견디며 조마조마하는 내 모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과 만나서 커피를 마시는 데, 공교롭게도 상대방이 계산하는 경우’다. 보통 아메리카노는 그 카페의 메뉴 중 가장 저렴하고 대중적인 음료라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며 비싼 메뉴를 골랐다고 눈치 주지도 않는, 아주 보편적인 음료다. 물론 커피가 매개가 된 이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아메리카노 1잔도 채 마시지 못한다. 차가운 얼음이 들어가는 아이스 음료의 경우 가격이 같거나 500원이 추가되는 경우가 많아 여름엔 차가운 음료를 개인적으로 선호하지만 위의 경우에서는 그냥 따뜻한 음료를 주문한다. 그것이 가장 저렴하면서 상대방에게 부담되지 않는 선이라고 생각해서다.
어린 시절 부모님 몰래 한 잔씩 마셔보고 했던 믹스커피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자판기 커피 한 잔도 늘 블랙커피만을 선택하던 엄마가 마시던 쓰기만 한 아메리카노는 영 내 입에 맞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그 쓴 맛도 다르게 느껴질 줄 알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향긋한 그 커피의 향과는 다르게 여전히 내겐 씁쓸한 맛이다.
2. 커피 한 잔 어때요?
커피 한 잔 어때요?
무슨 말을 하려 하나요?
나 자꾸 두근거려요 말 좀 해봐요
- 소녀시대 <캐러멜 커피>
“커피 한 잔 할래요?”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내가 먼저 꺼내긴 쉽지 않은 말이지만 나에게 이 말은 “지금 당신과 함께 대화하고 싶어요”로 바뀌어 들리기 때문이다. 흔히 공사를 막론하고 이곳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더 이어가자는 뜻으로 비유적으로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들을 때마다 설렌다. 사실 난 이 말에서 ‘커피’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고 생각했다. 커피는 그저 당신과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낼 매개가 될 뿐이라고, 그 정도의 의미로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커피에 대 한 관점이 새삼 다르게 보였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3. 커피, 아니 카페 좋아하세요?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던 너와 나
갈 곳이 없어도 일단 그냥 만나
매번 그랬지 아무 준비 없이 만나도
커피와 음악이면 금방 지나갔지 한나절
- 다미아노 <Skyfall>
나에게는 카페를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화장실이 매장 내에 있는지, 둘째, 오래 있어도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는지, 셋째는 손님이 너무 많은 곳은 아닌지를 먼저 살핀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니 맛에 따라 고르지 않고, 보통 이 3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카페에 가서 메뉴판을 보고 제조음료 중 하나를 골라 주문한다. 물론 이것저것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닐 때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페를 선택한다. 망원동의 어느 아인슈페너가 맛있던 카페에서 마셨던 핸드드립 커피 위에 가지런히 쌓인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의 아인슈페너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남아있다. 카페를 커피 맛으로 기억하는 건 내게 아주 특별한 경우다. 2020년 7월, 나는 한 복합문화공간의 공연 업무를 위해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복합문화공간 내 카페에서 일하던 바리스타 2명의 불화로 인해 1명이 퇴사 선언을 하면서 갑자기 상황이 바뀌게 된다. 회사의 권유로 얼떨결에 카페 일을 하게 된 나는 처음에 음료 제조 기술과 레시피를 외우느라 애를 먹었다. 특히 우유 스티밍이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잡히고 나니 다양한 모습의 손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늘 어떤 용건이나 일이 있어야 카페에 왔지만 내가 만나는 손님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음료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대화를 나누며 사진을 찍거나 공부를 하는 손님 말고도 하루 종일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던 손님, 테이블에 엎드려 자는 손님, 루프탑으로 나가려다 눈앞의 방충망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가 방충망을 뚫어버린 손님 등 세상 여러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카페에서 만날 수 있었다. 평소 자유롭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적의 위치였다. 카페 업무는 내게 이전에 해왔던 업무만큼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못했다. 여느 평범한 카페였지만 카페의 배경음악 플레이리스트마저 회사가 지시하는 대로 해야만 했고 그래서 더 자유로운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곳에서 일하고 있지 않지만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커피와 카페가 나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불현듯 카페에서 일하며 마셨던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의 향이 코 끝을 스쳐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