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막혔다.
지금 사는 곳에서 일 년 반 동안 변기를 세 번이나 뚫었다. 특히 최근 한 달 새 두 번이나 막혔고 나는 아직 이 상황에 태연해지지 못했다. 누군가는 한 번도 겪지 않을 일인데. 여전히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변기가 막히면 너무 당황스럽다. 자연의 결과물들이 막아도 당황스럽지만 핸드폰을 빠뜨리거나 물을 내리다 옆에 세워뒀던 칫솔이 우연히 떨어져 막히는 경우는 변기를 뜯어야 해서 대략 10만 원 이상의 상당한 비용이 든다. 이제는 변기 주변에 그쪽으로 떨어질 만한 것들은 다 없앴고, 자연스러운 것들이 원활한 흐름을 막았다면 조용히 손에 뚫어뻥을 장전한다.
잘 나가다 막히는 것이 변기만 있는 건 아니다. 갑자기 다음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었을까?
1. 자연의 결과물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a.k.a. 변비)
고등학교 3학년 때 급하게 음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남들이 2년~4년에 걸쳐서 하는 공부를 10개월 만에 압축해서 습득해야 하니 쉽지 않았다. 하교 후 해가 떠 있을 땐 피아노 연습을 하고, 해가 지면 곡을 썼다. 단기간 최대 효율을 목표로 해야 했던 나는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식사를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결국 이게 스트레스와 겹쳐 변비가 생겼다. 이때의 변비는 꽤 심해서 약국에서 약을 사 먹어야 했다. 다행히 그때 이후 지금까지는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변비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에 유산균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2. 창작의 결과물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경우(전제: 마감)
예술가의 길이 고되고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예술가라고 늘 아이디어가 퐁퐁 샘솟는 것이 아니니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경우는 안되면 안 되는대로 최대한 미룬다. 마감이 목을 죄는 불안을 느끼면서 조금씩 쓰다 멈추기를 반복하면 어느 순간 진도가 빨라지는 시기가 있다. 바로 마감이 눈앞에 다가와 손을 흔들고 있을 때다. 이렇게 러닝타임 약 8분의 졸업연주회 무대에 올릴 곡도 일주일 만에 다 썼다.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그 순간의 절박함이 나의 최대 무기였다.
3. 알고 있었던 걸 말하려는 데 말이 막히는 경우
누군가와 어떤 단어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둘 다 “그게 뭐더라?” 하게 되는 때가 있다. 두 사람 다 그 상황에 적재적소인 말이 생각나는데 이게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머릿속으로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럴 때 나는 상대방이라도 그 단어를 떠올릴 수 있도록 내가 아는 모든 말을 자세히 풀어서 그 단어를 설명한다. 예를 들어 과일 ‘체리’가 기억나지 않으면 “마트에 가면 파는 과일 중에 검붉은 색이고 미국산이 많은데... 아 맞아! 후르츠칵테일 통조림으로도 나오고 옛날 빵집에 가면 케이크 위에 올려주는 그 빨갛고 꼭지가 긴 과일” 이런 식이다. 구구절절이지만 나 스스로도 연상하면서 기억을 되짚어보는 기회가 된다.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서는 막히기도 하고, 또 의도치 않은 어려운 상황에서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도 있다. 어떤 상황에도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그저 나만의 방법을 찾고, 다른 사람의 방법이 더 효과적인 것 같을 때는 참고해서 활용한다. 막히지 않은, 뻥 뚫린 일상을 위한 그 모든 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