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교사의 백수 일기_1화

백수 1일 차 ~ 5일 차: 이제 휴지심으로 뭐하지?

by 붱draw

<프롤로그>

‘교사’라는 직업을 천직이라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 중서부에서의 해외살이, 그리고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생각보다 큰 도전이었다. 특히 행동장애 학생이 적지 않은 학교에서는, 교육자라기보단 도망치지 못하는 노예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때로는 너무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 그만두고 사라져버리고 싶은 감정에 휩싸이기를 수십 번. 그래도 지금껏 노력해 온 것들이 아깝고, 그만두면 뭘 해야 할지 막막하고... 그래서 버티는 쪽을 택했다. 버티고 또 버텨 3년을 꼬박 버텼다. ‘내년은 또 어떻게 버티지?’ 그런 생각에 잠을 뒤척이던 어느 날 밤, 남편이 싱가포르로 이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아, 나 당분간 백수가 될 수도 있는 거야?’
이렇게 시작된 나의 백수 이야기.


백수 1일 차 : 휴지심


예전엔 어린 예술가들의 만들기 수업을 위해 휴지심을 모았었다.
백수가 된 오늘 아침, 휴지 다 쓰고 남은 심 하나 들고선,
멍하니 바라본다.
‘이젠 이걸로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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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2일 차: 문집 속 아이들


나른한 오후,
2024-2025학년 3-5학년 아이들의 문집을 읽었다.
시, 랩, 노래, 픽션, 논픽션...
귀엽고 사랑스럽고, 유쾌하고 위트 있으며, 감동적이고 심오하다.
창의적인 친구들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글로 풀어낸 창의성을 보니 또 새롭다.
요즘 읽은 책들 중 단연 최고로 흥미롭고 재밌다!



백수 3일 차: 백수의 일요일


직원이었을 때도 백수가 된 후에도 일요일 일상엔 변함이 없다.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일어나 집 청소를 하고 고양이들 밥그릇, 물그릇을 닦는다.

동네에 애정하는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고 장을 본다.

남편이 냉동 새우와 여름옷가지들을 사자고 해서 오늘은 코스트코에 다녀왔다. 가성비 좋은 한철 편하게 입을 옷을 고르기엔 딱이다. 물론 스타일은 포기해야 하지만.


평소와 다른 일상이라면, 고양이들 장거리 여행 적응 훈련을 시작했다는 거다.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우니 답답해서 그러는 건지,
캐리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건지,
캐리어에 넣기만 하면 울어대기 시작한다.
애교 많고 세상 스윗한 아이들인데,
캐리어 안에서 내내 우니 넘 마음이 아프다.
‘얘들아, 같이 살려면 어쩔 수 없어. 조금만 참자.’
첫 훈련은 짧게 마치고,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좀 더 찾아보고 시행해보기로 했다.

PXL_20250617_222035981.jpg �시스코 & 데이지�

아, 그리고 백수 된 후 첫 일요일의 특별함이라면, 밤에 자정을 넘겨 잤다는 거다!
월요일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으니 그게 어렵지 않게 되더라.
일부러 늦게 잔 건 아니고 옷장 정리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다음날 출근을 생각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을 청했을 텐데,
백수에겐 이런 의외의 특권이 주어지는구나!
백수, 좋은데?!



백수 4일 차: 잘 보내는 백수의 하루


어쩌면 오늘이 진짜 백수가 된 첫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출근 안 하는 월요일이라니!
아 물론 방학이라 여전히 직원인 다른 교사들도 출근 안 한다.
그들과 나의 차이라면, 그들은 고용된 상태에서 휴가 중인 거고, 나는 실업 중이라는 거다.
예전에 친구랑 “남편 주재원 따라 외국 가는 사람들 부럽더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땐 그저 막연한 동경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지금 내 상황이 그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실업 상태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감이 없다.
물론 낭만적인 현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기가 주어진 게 감사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진짜 백수가 된 오늘 하루를 잘 보내보기로 했다.
잘 보내는 백수의 하루란? 어디 그런 정의가 있던가?
지금의 나에게 ‘잘 보내는 백수의 하루’란, 불안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오늘은 그야말로 잘 보낸 진정한 백수의 하루였다.

아, 그렇다고 아무 생각조차 없이 지낸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생각도 했다.
또 생긴 빈 휴지심. 이걸로 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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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5일 차: 계획이 생기는 백수


나는 백수지만 바깥양반은 아직 근로자이다. 주 3일 재택 근무인지라 오늘 출근 준비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그래도 아내 노릇은 해야겠기에 마냥 침대에 있을 수만은 없다. 지난 주말 남편 여름옷 장만 때 따라 산 내 여름 잠옷을 평상복, 누가 불쑥 찾아와도 바로 문 열 수 있을 정도의 홈웨어로 휘리릭 갈아입고 아침식사를 챙겼다.

근무할 땐 오늘, 화요일이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인데... 그런데 지금 나는 쇼파에 누워 있다니?!
아직 실업자가 된 것이 실감 나지 않아 바뀐 현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오늘은 신발, 책, 미술 도구들, 그 외 잡동사니를 정리한 후 운동이란 것을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사다 놓은 천으로 재봉을 시작해볼까?란 계획도 세웠다. 백수 5일 차쯤 되니 경제활동을 떠나 뭐라도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겠단 불안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 아직 믿기진 않지만, 몸과 마음에 잔재해 있는 근로자 세포 때문일 테지?

저녁엔 남편이 재택 근무를 마치고 함께 아이스크림 샵에 갔다.
낯설지만 느슨한 하루, 그 속에서 올라오는 불안의 시작.
백수의 어정쩡한 기분이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 한 스푼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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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부터는 직접 그린 그림도 곁들여 보려 해요.
글과 그림이 함께하는 백수 일기, 기대해 주세요! ^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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