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습관에 관하여
최근 즐겨보게 된 유튜브 프로그램이 있다. 문화, 예술, 철학,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라플위클리’. 알고보니 작년 7월에 시작해 현재 시즌 5이 이어지고 있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 나도 모르게 ‘왜 이제서야 알게됐지?’라는 탄식이 나올정도로 몰두해 보고 있다.
‘습관’을 주제로 진행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동진 평론가가 본인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가 초등학생때부터 써오던 일기장들을 어떤 이유로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탔는데, 그 가방을 지하철 선반 위에 두고 내렸단걸 알게 된 것이다. 일기장을 찾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 그의 감정이 반전이었다. 수십 년간 써온 일기장을 잃어버린 슬픔이나 아쉬움보다,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컸다는 거다. 그 후론 전혀 일기를 쓰고 있지 않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경험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과거에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위해 언어 앱을 매일 사용했다. 100일, 200일을 넘기고, 해를 거듭하며 1,000일 넘는 기록을 이어갔다. 스스로 뿌듯해하고 SNS에 자랑하기도 했다. 하루에 3분 안팎이었기에, 내 스페인어 실력이 크게 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하는거 보단 낫지’, 라며 여행 가서도 챙길만큼 꾸준히 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뭔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 확인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년 겨울, 와이파이가 없는 환경에서 일주일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앱은 매일 하지 않아도 48시간 내로 돌아가면 기록이 유지되는 시스템이였다. 처음엔 어떻게든 주변에서 와이파이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48시간이 지나버리자 결국 체념하게 됐다. 1038일에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은 이틀만에 사라졌다. 오히려 ‘다음에 스페인어를 다시 배우게 되면, 제대로 된 방법으로 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공교롭게도 한 친구가 가족플랜으로 그 앱을 사용할 계획이라며 나를 초대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답했다. “내 생각 해 줘서 정말 고마워. 실은 어쩌다 그 앱 공부를 중단하게 됐는데, 지금 해방감을 맛보고 있는 중이라..다음에 기회 됨 같이 하자.”
이동진 평론가의 수십 년 일기장과 비교하면 내 1038일은 작지만, 나는 그의 해방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습관을 이어나간다는 것을 숫자등으로 증명하고 확인받는 데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특히 끝없는 숫자로 자신을 증명하는 듯한 기록들에는 피로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습관을 비롯해 꾸준하게 무언가를 이어가는 사람과 행동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은 여전히 진심이다. 숫자로 증명하는 습관이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게 됐다고 느낀 것뿐, 각자의 방식으로 꾸준히 이어가는 사람들의 노력은 언제나 존중한다. 또한 좋은 습관을 만들고 나쁜 습관을 줄이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노력하는 모습에도 응원을 보낸다. 다만, 타인에게 ‘나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다’ 라는 증명을 위한 습관에는 더이상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는, 나만의 삶의 철학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불현듯 ‘굿 플레이스’라는 미드가 생각난다.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이자 철학적 풍자가 있는 그 드라마를 꽤나 재미있게 봤다. 마지막 시즌에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완벽한 장소에서 완벽한 사람들과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모습이 발견된다. ‘소멸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면서, 진정한 행복과 의미있는 삶이란 ‘영원’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현실 세계에 적용해 보면 ‘존엄사’와 연결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개념을 일상으로 가져오면, 우리의 작은 선택의 자유, 곧 습관을 선택하고 이어나가는 권리와 연결할 수 있다. 나의 하루, 나의 일상,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습관들. 끝나지 않는 숫자에 얽매이기보다, 나의 선택으로 순간순간 해 나가고 싶다. 그렇게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되는 습관들을 만들고 이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