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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Mar 21. 2016

견해차이

마음이 어느 면을 보는가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

  똑 같는 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아프리카에 가서 신발을 팔러 간 사람이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신발을 신지 않으니 못팔겠다는 사람과 이곳에서 사는 사람은 신발을 신지  않으니 신발을 팔아봐야 겠다는 견해는 아주 단순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을 보고도 멀쩡한 사람이 미쳤다고 보는 경우와 멋지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위험성을 감안한다면 오토바이는 네바퀴가 있는 자동차 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런데 그것을 타는 사람은 바람을 가르는 느낌과 속도감에서 오는 쾌감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쾌감은 익스트림스포츠 같이 위험성을 동시에 안고 있고 그로 인해 사망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이처럼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에 따라 삶의 방식은 달라진다.


  한 사람이 너무나 미워 견딜 수 없는데 그 미움만큼  사랑하는 마음도 이면에 숨겨져 있다는 이론이 양가감정이다. 내가 타인에게 가장 싫어하는 그 모습은 실상은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점 만을 바라보고 있는 자기자신의 모습에 한계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타인이 자신의 결점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에 극도의 증오감이 생겨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이론이 아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에 염두해 두고 서로 사랑하거나 사람했던 사이였을 때를 기저하 할 때 적용된다.

  


 이처럼 똑 같은 일을 겪는데도 누구에게는 관대하고 너그러우면서도 누구에게는 매정하고 차갑다. 아이들의 양육방법에서도 아버지의 엄격함이 아이들을 더 정직하고 제대로 키울 수 있고 관대하고 친근함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견해차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폰중독과 게임에 빠지기 쉽다. 아이들을 내버려 두면 방치가 되고 과도한 참견에 채벌을 가하면 자칫 폭력 부모가 된다. 엄격한 규율로만 아이들을 대해서도 안되지만 부모의 방관및 방임은 채벌보다 못하다. 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체벌 방식에 매를 대는 것이 무조건 적으로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과도한 것은 과잉이 되고 과잉은 약이 아닌 독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엄격,침묵, 근엄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한 아이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고 체벌을 금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이제는 역적이 되어 학생이 선생을 구타하고 부모를 아이들이 신고하는 세대가 되었다. 방임하지 않고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감정이 앞선 나머지 체벌을 체벌로 보지 않고 폭력으로 몰아가는 것은 선생도 부모노릇도 하지말고 내버려 두라는 뜻은 아니지 않는가.


  누구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옳고 그름의 범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결정된다. 어떤 것을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할 수 없으며 흑백논리로만 몰아가기에는 모호함과 애매성이 너무도 많다.  옳고 그름은 제 각기 가치관에 따라 다르고 그것의 정당성과 부당함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문제는 다른 견해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나만 옳다는 생각이 버려져야 상대를 인정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용서없이 타인도 용서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고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지  적정한 범위 내에서 존중받을 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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