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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Mar 25. 2016

상실의 논리적 대처가 가능한가

있을 때 잘해야지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갖가지 많은 일들은 겪는다는 뜻입니다. 별일을 다 겪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번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겪어간다는 뜻이겠지요. 처음에는 새것이므로 잘 사용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우연히 휴대폰 액정이 깨어지만 마음도 깨부서지는 것 같아 볼 때 마다 힘겹습니다. 우리에게 힘든 것은 상실의 순간 뿐 아니라 상실 그 자체를 볼 때마다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아니라 해도 이미 쏟아진 물같은 것이지요. 소중한 물건이든 소중한 사람이든 자주 접하고 빈번히 마주 하게 됩니다.


  공기와 산소는 늘 주변에 있어도 늘 있으니까 소중함을 못느끼다가 단 하루라도 물이 나오지 않을 때 소중함을 알며, 밀폐된 공간에서 숨도 쉴 수 없을 때 공기의 소중함을 압니다. 늘 있을 때는 모르다가 없을 때 그 의미를 아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부모도 있을 때는 속을 썩이고 힘들게 하고 정작 그들이 떠나고 서럽게 운들 무슨 소용입니까.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상실한 사람이 느끼는 충고이자 조언입니다.

 삶은 눈이 쌓여있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빨리 지나가 버립니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며 다시는 돌아오지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 의미가 있다. 때를 놓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시간을 잡아야 한다.

  라면을 끓이면 바로 먹어야 합니다. 커피도 처음 끊여서 바로 마셔야 제맛이 납니다. 몇 시간이 지난 라면은 부풀어 있고 며칠이 지난 라면은 상해서 먹지도 못합니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냉장고 안에 음식도 때를 놓치면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져야 합니다. 몸으로 가야할 영양분이 악취를 내는 음식물 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젊음도 한 때 인 것입니다. 늙어보지 않는 젊음이 어떻게 그 소중함을 알까요? 시간은 돈을 주고도 매매가 되지 않지만 노동을 통해서 시간을 돈을 주고 환산을 합니다. 그렇다고 1년에 1억을 준다고 하면 바꿀 생각이 나지만 60년을 60억으로 바꾸자고 하면 바꿀 마음이 날까요? 돈은 늘 벌수도 있지만 인생의 시간은 수십억의 가치로도 환산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은 다양한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가족이라는 절대적 혈연적 관계 뿐만 이니라 사회적인 인맥은 세상을 살아가는 근거이자 이유이게 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삶의 방식 해법을 줍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삶이 있고 그 사람만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분명한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삶에서 누군가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사 타인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타인의 상실로 인한 역경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서 만남이 중요하지만 이별은 만남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 옵니다. 때로는 가혹한 형벌처럼 느껴집니다. 예정된 이별보다 더 힘든 것은 뜻밖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이별입니다. 이별에는 많은 함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죽음, 끝, 다시는 볼 수 없음, 존재의 부재, 상실, 모욕감, 멸시 등이 그것입니다.  

  인내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상실은 많은 인내을 필요로 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도 평생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다수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가족을 위해서 입니다. 가족이 사라져 버리면 우리는 뜻밖에 놓여진 "너만을 위해서 살아 이제 부터는?" 이때 갑작스런 답의 부재가 놓여지고 대체 난 무엇을 위해 살지 라고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궁색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러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살고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위해 또 어찌 되었건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너를 위해 살라고 하면 어떤 죄를 짓은냥 두려움이 몰려 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위하면서 존재의 이유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위하는 진정한 길이 타인을 위하면 그것이 자신을 더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회 속에서 유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존재의 의미를 알려고 했던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진정 생각해주고, 힘든 일이면 늘 발벗고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우리는 그들을 가족으로 친구로 소중히 여겼다면 우리 스스로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생존수단으로 여겼던 것은 아닌지 의문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인가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타인을 소유하는 함으로써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믿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있어서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떤 상실에 직면하게 되면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들이 존재하지않아도 이미 존재한 인간이고 그 누구로 부터 존중받을 만한 권리가 있습니다. 누군가 있어서 존중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존중받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의미는 소유한다고 믿은 존재가 떠나면 내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가? 나는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없고 의미 없는 존재이므로 나도 세상을 살 의미 자체가 상실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소유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소유한 대상이 살아지면 나오 살아져야 한다는 모순에 직면합니다.


  살다보면 소중한 사람이나 사물도 언제든지 우리 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지만 직면하고 있는 당면한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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