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개로의 명을 받아 동생인 곤지는 개로의 아내 즉 형수와 일본에 가게 되고 일본 규슈지역에서 무녕을 태어났다.
왕릉의 지석의 내용을 보면 당시 태어날 때 그 나이가 1살이 아니라 0살부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고, 3년상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사후 빈소에 모셨으며 빙고(氷庫)를 사용하여 시신을 임시로 땅을 지하로 파여 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시신을 저장했음을 알 수 있다.
1. 무령왕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 그림 1. 무령왕릉 >
[ 무령왕(武寧王)은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년~523년)으로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隆)입니다. 501년 선왕인 동성왕이 시해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왕위에 즉위한 무령왕은 귀족세력을 통제하고 담로제(擔魯制)를 통해 지방통치를 강화하여 내정을 안정시켰으며 백성에게 귀농과 정착을 장려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이루었다.]
(1) 개로왕
삼국시대 백제의 제21대(재위:455~475) 왕. 재위 455∼475. 이름은 '여경(餘慶)'또는 ‘경사(慶司)’, 또는 ‘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고, 제22대왕인 문주왕의 아버지이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간첩으로 파견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졌고 도성이 공격당해 개로왕은 탈출하는 도중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개로왕(蓋鹵王))]
(2) 부여 곤지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부여곤지의 큰아들이다. 부여곤지가 왜국으로 파견 나갈 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사마, 즉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 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부여곤지의 왜국 파견 시기가 일치하고,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 늘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5년(461년) 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왕비)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부여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섬인 카카라노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나무위키 백과: https://namu.wiki/w/무령왕)
(3) 동성왕의 아들
부왕은 개로왕이거나 부여곤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2. 무령왕릉의 발굴 의의
'송산리 고분군을 도굴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무령왕릉을 그 근처에 있던 6호분을 주위에서 감싸기 위해 만든 언덕으로 착각하여 더 이상의 도굴을 진행하지 않았고 이 덕분에 다행히도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https://www.gongju.go.kr/kr/sub06_10_03_01.do 공주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관련기사)
'1500년 백제를 깨우다'라는 기사에 무령왕릉의 발굴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령왕릉은 백제 연구에 중요한 단서로 고대 왕릉과 왕비의 장례를 어떻게 합장을 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무령왕릉에서는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 유물은 총 108종 4,600여점으로 이 중에서 12점은 국보로 지정되어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예술 및 정신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백제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지석의 내용과 고분의 형식, 출토유물들을 통해 6세기 전반 백제의 대외관계에서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무령왕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통해 백제의 매장 풍습, 도교사상에 입각한 매지권을 추정할 수 있다.
무녕왕 즉위 후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직접 출정하여 한강 유역의 성을 장악하는 등 어느 정도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여 남쪽으로는 가야 지역에 대해 적극적인 공략을 추진하여 대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내외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521년 무령왕은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누파구려 갱위강국(累破句麗 更爲强國)” 즉, 백제가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하여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이에 대해 양나라는 무령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指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함으로써 무령왕과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견고히 한다. 이로써 무령왕은 475년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백제의 위상을 되찾았다.(공주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기사 참조)
3. 무령왕릉 지석 해설
<그림 2. 무령왕릉 지석>
상기 그림은 무령왕릉 지석이다. 왕과 왕비 각 2면의 지석으로 발굴되었다. 지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과 왕비의 행상을 기록했다.
<그림 3. 무령왕릉 지석 탁본>
영동대 장군 백제 사마왕 62세 계묘년 5월이라 기록되어 있다. 해설을 상세하게 해석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 앞면>
기록을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영동대장 백제 사마왕에서 백제는 중국으로 부터 고구려보다 한 등급 높은 작호를 받은 것이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라 봐야 한다. 무령왕릉 때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된 것을 극복하고 정상국가로 회복되었으며, 영동대장군이라는 작호가 중요한 부분이다.
年六十二歲 癸卯年 五月丙戌
62세가 되는 계묘년 임진월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는데 비문에는 병술에서 술이 성(成)처럼 오독될 가능성이 있다. 계묘년은 523년이다. 일본 지석 서기에 461년 6월 1일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523년 5월 7일 사망한 것이다.
朔七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 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 / 登冠大墓 立志如左
삭 7일 임진 붕으로 붕(崩)은 '무너질collapse, die' 붕으로 백제왕의 돌아가심을 뜻한다. 525년 8월 12일 등관 되었다는 뜻은 27개월 만에 왕릉에 모셨던 것으로 보아 3년 상(喪)을 치른 후 대묘(大墓)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3년 동안 무녕왕은 어디에 임시로 놓아두었을까. 시신을 목관에 놓아두었다고 추정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두침(頭枕 베개 침)과 발받침 즉 머리와 발을 놓는 받침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목관에 임시로 두었다가 왕릉으로 옮기는 것으로 하는 것이 학자 서정석의 견해다. 3년 상을 치르는데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얼음을 사용하여 냉동 보관한 것으로 본다.
서정석 무녕왕의 묘지(墓誌) 해설
무령은 '굳세다' 라는 의미의 '무(武)'와 '편안함'을 뜻하는 령(寧)이다. 사마는 일본 섬에서 태어났기에 사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본으로 파견된 도중 규슈앞바다에서 태어났므로, 사마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해설문에서 안조(安厝, 편안할 안, 둘 조)는 즉 임시로 매장을 한 것을 뜻한다. 즉 임시로 매장한 후 릉에 모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등관(登冠)'은 무슨 뜻일까? '오르다'라는 의미와 갓 관이니 '올려 모셨다' 혹은 '올려 안장하다'로 보기도 한다.
무령왕 지석을 살펴보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에서 무(戊)를 술(戌)로 오기한 것으로 보이며, 상기 새겨지지 않는 두 글자는 경(庚)과 신(辛)으로 추정된다. 지석 뒷면에 새겨진 것을 '간지'도라고 했고, 왕릉이 서쪽에 있어서 새기지 않았는가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릉이 있다고 경신을 새기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 그 시대 새긴 사람의 의도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뒤편 지지를 추정해 보면 자오묘유에서 자는 북방, 오는 남방, 묘는 동방, 유는 서방이지만 비석에는 보이지 않는다.
방위에 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4. 무령 왕비 지석 해설
<그림 4. 무령왕릉 왕비 지석>
<그림 5. 무령 왕비 지석>
<그림 6. 무령 왕비 지석 >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 그림 7. 오수전((五銖錢) >
오수전(五銖錢)은 고대 중국에서 유통된 화폐로, 전한 무제 때인 원수 5년(기원전 118년)에 처음으로 주조되었다. 질량이 당시 도량형으로 5수(銖)였기 때문에 오수전이라고 불렸다.
백제 고고학 교수 서정석 해설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終
병오년은 526년으로 3년 상을 치르고 수종은 온전히 살고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은색 팔찌 두 점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경자년(520년)에 왕이 왕비를 만들어진 것이다. 경자년(2020)년이 팔찌가 만들어진지 1500년이 되는 해다. '달'이라는 장인이 왕의 부탁으로 만든 것이다. 이 팔지는 어째서 당시에 팔찌를 선물했을까. 520년이 왕비의 회갑이어서 선물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왕비는 무녕왕보다 한 살이 연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居喪在酉地
거상재유지인데, 유지에서 상을 치렀으며, 유(酉)는 서쪽을 상징하므로 빈소를 서쪽에 마련되었다.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
기유년에 2월 지금의 왕묘에 이장한 것이다. 526년 11월에 돌아가시고 529년 2월에 왕릉으로 함께 모셨다. 빈소에 놓았다가 왕릉에 묘신 것을 '개장(改葬)'한 것으로 보인다.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5. '진묘수'(鎭墓獸)
<그림 7.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국보 제162호로 지정된 동물상 '석수'(石獸)로 무덤을 지키는 짐승인 '진묘수'(鎭墓獸)이다. 무덤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해 놓여 있으며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인' 진묘수는 입이 뭉뚝하고,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 철제 뿔 하나를 단 유니콘 모양을 하고 있다. 몸통 좌우와 다리에는 날개를 표현했고, 불꽃무늬를 조각했다.(출처:https://www.yna.co.kr/view/AKR20181211078900005)
백제 고고학 교수 서정석 해설
<그림 8. 무령왕릉 빈전 재현, 서정석 해설>
<그림 9. 무령왕릉 지리적 위치>
6. 무녕왕에 대한 다큐멘터리
(1) 백제 무령왕,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꿈꾸다 / KBS대전 20170924 방송
(무령왕릉에 대한 역사적인 관찰과 무녕왕과 중국 양무제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 무령왕 탄생은 백제가 아니라 일본 카카라시마이다. 공주와 카카라시마는 상호자매결연으로 2002년 부터 탄신제를 연다. 백제에 공주보다 더 화려하고 성대하게 개최된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거대한 발굴이었다. 무령왕릉은 아치형 무덤으로 진묘수가 기묘하게 있으며 오수전이 올려있는 석판이 있다.
영동대장은 중국 양무제로 받은 작호이다. 주변국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무덤은 왕과 왕비의 108점의 진기한 장신품이 발견된다. 갱이강국 즉 기울어가는 백제를 일으켜 세운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공격한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위례성을 공격하고 개로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문주, 삼근, 동성왕은 자객에 의해 죽게 된다. 501년 대혼란 시대 무녕왕이 등극한다. 무녕왕은 외교 채널을 열고 내부 혼란을 수습한다. 양나라와 국교를 맺고 선진 문물을 전한다. 고구려의 위협을 외교를 통해 견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웅진시대 무덤은 공주 송산리 5호분은 굴(cave)형태였는데 아치형에 연꽃무늬까지 있으며, 과학적이며 화려하다. 6호분도 축조 방식이 달랐다. 중국 양나라의 양식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무녕왕 목관은 금송(金松)으로 일본 남부에서 들어온 것이다.
진묘수와 오수전은 부장품으로 특이할 점이다. 청동거울 3점, 백제등잔, 도자기, 형형색색 유리구술 등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양나라 때 유적을 보관한 중국 남경시 박물관은 당시 백제 무령왕릉 부장품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연꽃무늬 기와도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중국의 6조시대 성벽이나 배수로 등 옛 모습 그대로 당시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연꽃무늬 벽돌, 지석, 무령왕릉의 진묘수, 오수전 등도 발견된다. 흑유계수호는 닭머리의 문양이 있는 주전자가 6조 시대의 박물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무령왕은 중국 양나라의 물품을 가져와 개발하여 일본에 전하고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2) KBS 역사스페셜 –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 KBS 2003.5.3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