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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순만 Mar 08. 2023

1. 불교의 인간론

해탈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존재

제1장 해탈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존재

― 불교의 인간론     


본 글은 공주대학교 이효범 교수님의 글로 혼자 읽기 아까워서 원고를 올립니다.

지식은 널리 알리고 공감할 수 있다는 뜻에서 올립니다.


글 이효범


비구여 고苦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五蘊의 집착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잡아함경雜阿含經

        

1. 인간, 그 고통스런 존재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제기된 의문이다. 인도에 있어서 이 물음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맥락에서 제기된다. 인간이 어떤 상황 속에 있는가는 비유경比喩經 ‘흑백이서黑白二鼠’라는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길 잃은 나그네가 넓은 광야를 헤매고 있다. 방향도 잡지 못하고 어디론가 길을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광폭한 코끼리가 나타나 뒤쫓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없이 도망치던 나그네는 깊은 우물 하나를 발견한다. 우물가에는 칡넝쿨이 우물 속으로 늘어져 있어 나그네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칡넝쿨을 붙잡고 우물 속으로 피한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는 독룡이 혀를 너울거리고 쳐다보고 있고, 우물 벽 사방으로는 네 마리의 독사가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검은 쥐와 흰쥐가 번갈아 가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다. 그런데 마침 칡넝쿨 위에는 벌꿀이 있어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그네는 벌꿀 맛에 도취되어 주위의 위기 상황을 잊고 있다.   


  

Retrived by https://www.facebook.com/towisdom/photos/a.298276756919148/2758971540849645/


  불교에서는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광야를 헤매는 나그네는 미망迷妄한 인간의 생활을, 미친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빈 우물은 생사의 샘을, 독룡은 죽음의 그림자를, 네 마리의 독사는 인간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를, 칡넝쿨은 생명선을, 검은 쥐와 흰쥐는 밤과 낮을, 다섯 방울의 꿀물은 재물욕財物欲․색사욕色事欲․음식욕飮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이라는 다섯 가지 욕락(欲樂)을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존재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쾌락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은 무지하여 이렇게 거꾸로 된 가치관과 잘못된 망상 속에서 오욕락을 추구한다. 이런 경쟁적으로 재물을 모으는 데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을 범부凡夫라고 부른다. 그러나 범부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는 끝없는 마음의 동요와 저급한 행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이 고苦․집集․멸滅․도道라는 사성제四聖諦(cattari ariyasaccani)의 진리이다.


Reading Check Sunman's Opinion

1. 안수정등(岸樹井藤)이란 무엇인가?

  [인명(人命)의 위태로움을 비유하고 있다.  안수정등에서  '안수(岸樹)''강기슭의 나무'란 뜻이다.  대반열반경 1권에서 "이 몸은 마치 험준한 강기슭에 위태롭게 서 있는 큰 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쉽다.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고 설한 말씀에서 나왔다. 이 비유를 중국에서는 흔히 하유(河喩)라고 말한다] 네이버 지식인 참조.

  

  이 부분은 진퇴양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한 성찰을 하라는 운명 혹은 업karma에 해당하는 어떤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닐까.


2. 다섯 방울의 꿀물은 <재물욕財物欲․색사욕色事欲․음식욕飮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이라는 다섯 가지 욕락(欲樂)>을 비유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없다면 인류는 어떻게 생물학적 번식이 없었다면 인류는 존재의 명맥을 잇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욕구란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핍이 없으면 행동도 없다. 결핍이 있기에 인간은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사성제란 붓다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은 후에 녹야원鹿野苑에서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한 내용이다. 이 설법에서도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고통(dukkha)으로 파악한 붓다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이란 고통스런 것인데 그 고통을 여덟 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生이 ‘고’苦요, 노老가 ‘고’요, 병病이 ‘고’요, 사死가 ‘고’라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고’(애별리고愛別離苦)요, 미워하는 사람과 원수를 꼭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고’(원증회고怨憎會苦)요, 갖고자 하나 가질 수 없음이 ‘고’(구부득고求不得苦)요,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고’(오취온고五取蘊苦)라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고를 넘어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조건지어진 것이 고요, 변화무상한 것이 고요, 불안정한 것이 고요, 끊임없이 생성변천을 되풀이하는 것이 고요, 더 나아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고 말한다.     

 

온 세상이 불길에 잠겨있다.

온 세상이 연기에 감싸여 있다.

온 세상이 불에 사로잡혀 있다.

온 세상이 떨고 있다.


Reading Check

Q1> 이 부분은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염세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는 듯하다.

  기억을 추상적으로 더듬어 본다.

      

  <인간의 삶은 늘 고통스럽고, 사슬처럼 이어지는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나마 한 순간의 깨달음과 몰아의 순간이 열반이다.> 필자의 견해.


Q2> 불길에 휩싸인 생각이어야 세상은 돌아가지 않을까요?


  필요악 necessary evil의 존재란 어느 정도 세상에 문제가 있어야 돌아갈 수 있다는 견해다.

  

  환자가 있으니 병원이 존재하고 고장 난 차가 있으니 자동차 정비소가 있고, 인간이 배가 고파야 식당이 운영되고, 머리가 길어야 헤어디자이너가 일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완벽하다면 서로에게 의지할 이유가 없다. 외로움이 있으니까 교류가 있고, 의지적이니 의지하려고 서로가 만나 사랑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 자신을 낳는다.

  저마다 수도자가 되면 세상은 어찌 돌아가는가.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배우는 자가 있어야 하듯. 결핍 deficency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원천이다. (Sunman's contradiction 필자의 반론)




요컨대 붓다는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올바른 사문沙門의 길, 즉 해탈解脫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해탈이란 고를 벗어난 니르바나nirvana(涅槃) 상태이다. 불교의 인간 탐구는 마음속에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 즉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인 니르바나를 이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인간 자체의 자연과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실천적 수행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Reading Check

Q1> 수행을 어찌 하나요?


    108배를 하고 300배를, 1000배를 하고 1만배를 하면 뭔가 깨달아 지는 것이 있기나 할까. 나는 엄두가 나지 않으나 몸이 나마나지 않을 만큼 몸의 수양을 하면, 깨달음은 분명 올 것 같다. 이 질문은 절에 가서 뵙기 어려운 주지 스님에게 수행을 어찌하나요 라는 질문이 아니라 수행을 왜 해야 되는 것인지 여쭈어 보아야 겠다.


Q2> 자유롭고 평화의 경지인 열반의 경지가 대체 무엇인가요?


  격정의 불이 꺼지고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 여간해서는 다가서기 어려운 상태인 듯 합니다.  열반에 들 만큼 경지에 올라서, 그러니까 중생들이 모두 열반하면 중생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리는데 그럼 속세는 누가 지킬까요?


   

2. 인간에 관한 붓다Buddha 당시의 견해들     


  불교나 자이나교는 격변하는 시대에 발생한 대표적인 자유 사상적  종교 운동이었다. 그 당시 인도에는 불교나 자이나교 이외에도 많은 자유 사상 운동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불교 경전에서는 62가지, 자이나교 경전에서는 242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들은

 

   “종래의 바라문들과는 달리 사문沙門이라는 새로운 형의 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사문이란 일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촌락이나 도시에 유행하면서 걸식에 의해 생계를 유지해 가며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는 출가자들이었다.”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 나타난 수많은 경쟁하는 사상 운동들을 인간에 관한 이론을 중심으로 크게 분류해 본다면, 베다 전통에 입각한 정통 철학의 정신 중심주의(전변설轉變說, 생명전개설生命展開說,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사문 계통의 자유 사상가들의 물질 중심주의(적집설積集說,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 그리고 자이나교의 이원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이들 모두의 입장을 그릇된 견해라고 비판하고, 연기설緣起說에 입각한 새로운 인간론을 주장한다.



Break Reading


하늘은

컵하나에도 담을 수 있다.

바다가 하늘을 담고 있듯이.


Sunman's comments



  


   고대 인도인은 살아 있는 신체에는 생명의 호흡이 있고 죽으면 호흡이 정지된다는 사실로부터, 호흡이 신체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산 사람의 꿈속에 죽은 자가 나타난다는 경험을 통해서 죽은 자도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으로부터 인간에게는 영혼과 정신이 있어서 신체와는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고, 신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 남으며, 신체의 정수로서 신체의 통어자 역할을 하고, 영원히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여러 행위의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조명호 서각교실, 천안작가

  원래 호흡한다는 뜻으로부터 유래한 아트만tman이라는 말이 생명, 영혼, 자아, 개체의 정수 등을 의미하는 말로 변화되는 것도 이런 사고와 연관된다.



이처럼 개인의 심리적 기능을 중심으로 생각되었던 아트만이 우파니샤드Upaniad에 이르러서는 우주적인 제1원리인 브라만Brahman(범梵)과 동일하게 여겨지게 된다. 이로써 아트만은 자아의 영역을 넘어서 세계를 창조해 내는 근본 원리로 위치하게 된다. 인간의 자아(아트만)가 우주를 생성시키고 지배하는 원리와 동일하다고 하는 관념은 아타르바 베다Atharva-Veda에서 시작하여 브라마나Brhmaa 시대에 정착하고, 우파니샤드에 이르러서 완성된다.


   인간의 자아와 우주의 본체가 동일하다면 인간의 자아를 통해서 우주의 본체를 아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이전에는 궁극적 실체를 객관적 대상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만,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자아를 규명함으로써 찾으려고 하였다.

  해탈解脫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자아는 곧 절대자이므로 본질적으로 무한하며,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따라서 자아를 아는 사람은 곧 브라만이 되며, 해탈한다고 말해진다. 내가 아트만이요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 이외에 따로 원하거나 두려워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주의는 인간 정신의 우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정신이 인생에 있어서 모든 가치를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육체는 더러운 것, 고뇌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격렬한 고행苦行(tapas)이나 수정修定(yoga)에 의해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얻고자 하는 고행주의의 길을 가게 된다.

  


 정신주의가 인간 정신의 절대성을 강조한 데 반해 물질주의는 정반대의 입장에 선다. 물질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물질인 육체를 중시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가 몇 개의 물질적 원소의 모임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꿈돌이 얄팍다식

  

 인도에서 이러한 물질주의적 견해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유물론자이며 쾌락주의자였던 아지타 케샤 캄바린Ajita Ksa Kambalin과 노예의 아들이었던 푸라나 카샤파Prana Kyapa의 4요소설(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있다.

  

  그리고 파쿠다 카챠아야나Pakuda Kaccyana의 7요소설(4요소+고苦, 락樂, 생명生命(영혼))이 있다. 또한 ‘생활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수행하는 자들’이란 사명외도邪命外道의 마칼리 고살라Makkhali Gosla의 12요소설(7요소+득得, 실失, 생生, 사死, 허공虛空)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영혼을 인정하므로 언뜻 보면 이원론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영혼을 물체와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유물론적이다. 그들의 말하는 영혼이라는 관념은 고대 인도의 원주민 사이에서 막연히 생각되고 있던 물활론적 관념에 근거하고 있지만, 영혼을 원자와 같은 것으로 본 점에서는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질주의는 신체가 생명과 의식의 토대이고, 의식은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영혼이 신체와 별개의 것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신체와 더불어 인간이 완전히 소멸한다고 생각한다.


    아지타에 따르면 인간이 죽으면 인간을 구성하고 있던 ‘지’地는 외계의 지의 집합으로 돌아가고, ‘수’水는 수의 집합으로, ‘화’火는 화의 집합으로, ‘풍’風은 풍의 집합으로 돌아가서 모든 기관의 능력은 허공으로 돌아 들어간다.


 

  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으로서, 몸 이외에 죽은 뒤에도 독립하여 존재하는 영혼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내세에 행위의 결과를 누린다는 부질없는 희망 속에 현세의 삶을 즐기는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존재는 몸이 존재하는 만큼 현세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현세에서 몸의 쾌락을 얻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라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https://kabylia.wordpress.com/2014/04/05/eros-and-psyche-an-amazigh-tale-became-a-greek-myth/

  또 물질주의는 해탈이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이상이므로 다만 쾌락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만약 모든 쾌락이 고통과 섞여진다고 하여 자연적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마치 가시 때문에 생선을 먹지 않거나, 거지가 구걸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 된다. 그러므로 물질주의는 신체와 영혼의 동일성을 주장함으로써 현세적 찰나주의, 쾌락주의의 길을 가게 된다.


  정신과 육체가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 실체라고 생각하는 이원론의 입장은, 자이나교가 모든 존재를 영적인 것(jiva, 명命)과 비영적인 것(ajiva, 비명非命)이 결합하여 있다고 보는 것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자이나 교의에 따르면 영혼은 과거의 업으로 인해 육체에 의해 덮여지고 오염됨으로써 고통을 받게 된다. 따라서 영원한 안온함이라는 지극히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새로운 업이 유입하지 않도록 차단하고 이미 들어와 있는 업을 소멸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방법은 도덕적 행위와 고행을 통해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영혼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3. 다섯 가지 요소로 되어 있는 인간     

  

 세계는 시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정신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여래如來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 안 하는 것도 아닌가?

붓다는 이같은 질문(사류십난四類十難)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태도(avyaka, 무기無記)를 보인다.

  무기의 이유로서 붓다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인생의 급선무인 행복이나 열반에 드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므로 이 문제를 추구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는 실용주의적 설명을 한다. 이 점이 <전유경箭喩經>에서는 흥미 있는 독화살의 비유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아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자. 그의 친구와 친족들이 그를 위해서 의사를 불러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화살에 맞은 당사자는 “나를 쏜 자가 왕족인가, 바라문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를 알지 못하는 동안은 이 화살을 뽑지 말라. 또한 그 자의 성이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동안은 뽑지 말라. 또한 그 자는 키가 큰가, 작은가, 중간인가. 피부 빛깔이 검은가, 누런가, 혹은 금빛인가. 그 사람은 어디에 사는가.


 그의 활은 보통의 활인가, 강력한 활인가. 활시위나 활자루나, 그 깃의 재료는 어떤 것인가. 그의 활의 모양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알 수 없는 동안에는 이 화살을 뽑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런 일들을 알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는 죽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거룩하신 스승께서 나를 위하여 세계는 상주인가, 상주가 아닌가 등에 대해 그 어느 한쪽을 단정해서 말해 주지 않는 동안에는, 나는 거룩하신 스승 밑에서 청정한 행을 닦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수행을 완성한 스승은 그런 일을 설할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은 (고뇌 속에서) 죽고 말 것이다.      

   

  붓다가 무기한 이유를 설명하는 다른 입장에서는, 이치와 합하지 못하며 마땅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진리성의 입장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사류십난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는 경험적인 근거를 가지고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결론이 다같이 참일 수 있는 이율배반의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아무리 논의해도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말하는 이율 배반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육체와 영혼의 동일성을 주장하여 육체의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는 단멸론은 그 자체가 해탈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또 죽음과 관계없이 연속되는 자아가 있다고 하는 상주론은 아트만을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에까지 심화해 놓고 그러한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라고 하기 때문에 해탈은 있을 수 없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자기가 연속적인 동일성을 가진 존재로서 상주불멸常住不滅한다면 성장과 변화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거꾸로 자기가 찰나 찰나에 단절한다고 보면 기억, 경험의 연속성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옛날의 자기가 지금의 자기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연속되는 자아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의 무기중도無記中道의 입장은 이런 문제를 단순히 회피하거나 회의론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문제의 성격을 통찰함으로써 단斷, 상常, 유有, 무無를 초월한 새로운 차원에서 대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차원의 대답이란 연기설緣起說을 의미한다.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에서 연기가 잘 설명되고 있다.     


  카티야야나여, 이 세간의 사람들은 대개 두 입장에 의거해 있다. 그것은 즉 유와 무이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갖고 세간의 출현을 여실히 관하면, 세간에 있어 무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서 세간의 지멸을 관하면, 세간에 있어 유는 있을 수 없다. (…… 중략 ……) 카티야야나여, “일체가 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의 극단설이다. “일체가 없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제2의 극단설이다. 인격을 완성한 사람은 이 두 극단설에 가깝지 않은 중(도)으로서 법을 설한다.

무명無名에 의하여 행行이 일어나며, 행에 의하여 식識이 일어나며, 식에 의하여 명색名色이 일어나며, 명색에 의하여 육입六入이 일어나며, 육입에 의하여 촉觸이 일어나며, 촉에 의하여 수受가 일어나며, 수에 의하여 애愛가 일어나며, 애에 의하여 취取가 일어나며, 취에 의하여 유有가 일어나며, 유에 의하여 생生이 일어나며, 생에 의하여 노老, 사死, 슬픔, 고통, 걱정, 염려가 있다. 이리하여 이 괴로움의 집적 전체가 나타난다. 그러나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며,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 (중략)

  

  생이 멸하면 노, 사, 슬픔, 고통, 걱정, 염려가 멸한다. 이리하여 이 괴로움의 집적 전체가 멸한다.     

여기서는 내(일체)가 불멸하는 실체로서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극단으로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리는 중도에 있는데 그 중도의 구체적 내용은 연기설이라는 것이다.

  

 연기緣起란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연기緣起란 말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인데, 연기를 말하는 산스끄리뜨어 ‘쁘라띠땨 사무뜨빠다Pratitya samutpda’도,  ‘Pratitya’~ 때문에’ ‘~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da’‘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연기緣起란 일체의 존재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우연히 혹은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 것, 따라서 독립하거나 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THINKING POINT -  연기緣起

 

  [‘一物一語說’은 “하나의 사물이나 상황에 가장 알맞은 말은  하나의 말밖에 없다”라는 의미로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이다. 이에 대해 <한국현대문학대사전>에서는 “사물의 이름에는 오직 하나의 명사, 움직임에는 하나의 동사, 그것을 형용하는 데에는 오직 하나의 형용사가 있을 뿐이므로, 작가는 바로 이 하나밖에 없는 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플로베르의 지론이다” (쉽게 쓰는 언어학)]

  참고 자료출처: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03


  일물일어설과 연기설을 조합시키면 '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때 꼭 만나야 할 사람은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마주쳐야 하고 그런 인연으로 만나고 또 헤어진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우연으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사리풋다Śriputra(사리불舍利弗)는  <노속경蘆束經>에서 비유를 들어 연기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한다면 다른 갈대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고 보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연기의 전형적 모습은,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라고 표현된다. 이 연기의 공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곧 “말미암아 생긴다”는 측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곧 “말미암아 멸한다”는 측면이다. 『잡아함경』 335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이런 연기는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를 시간적인 생성 관계와 공간적, 논리적인 유무 관계로 규명한 것이며, 상호 의존적인 상의성相依性을 나타내고 있다. 즉 연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생멸변화의 흐름에 바탕하는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과와는 상관없는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관계까지도 포괄하여,  원인과 조건들이 상호 의존함으로써 결과적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순한 인과율과는 다르다. 불교는 연기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상호 조건 지우는 관계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모든 존재에 대한 규정도 기존의 다른 인도 사상의 입장과 달라지게 된다.

   그러면 새로운 차원인 연기설을 바탕으로 해서 붓다는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붓다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 그 하나는 악덕 번뇌의 바탕으로서의 자기로서 멸각滅却되어야 할 대상(소아小我)이다. 다른 하나는 이상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자기(대아大我)로서 회복되어야 할 자기이다. 전자는 이상으로부터 괴리되어 항상 타락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는 성자가 구현하고 있는 인간이 항상 추구해야 할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자기이다.


  그런데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항상 근심, 동요, 불안,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범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인정되는 자기(소아)를 진실한 자기(대아)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일상적 자기는 끊임없이 변한다. 영원한 자기, 즉 아트만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일체一切는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눈, 귀, 코, 혀, 몸, 의지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여섯 가지 인식 기관(육근六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 법이라는 인식 기관(능력)의 대상(육경六境)을 합한 것이 나의 모든 것, 즉 나 자체(일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이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합쳐 십이처十二處라고 한다).


  여기서 일체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나 일체만유一體萬有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존을 구성하고 있는 내적이거나 외적인 모든 요소를 가리킨다. “초기 불경은 범부 하나하나가 만들고 유지하고 강화해 나가는 나의 세계, 그런 주관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 세계를 로카loka라고 불렀다. 주로 세간世間이라고 한역되었던 이 말은, 범부가 소유하고 있는 낱낱의 소유물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런 소유물로 이뤄진 세계 전체를 지칭한다.” 이런 인간을 구성하는 인식 기관과 그 대상은 독립된 실체도 아니고 불변하는 요소도 아니다. 그것들은 상호 조건적으로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육근이 육경을 인식하는 과정, 그것이 곧 인간의 전부의 모습인 것이다. 그 속에 따로 나라고 할 것은 없다. 나는 무아無我인 셈이다.


   불교는 이런 무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오온설五蘊說을 주장한다. 오온설에 따르면 인간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다섯 가지 부분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를 오온이라고 하는데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색(rpa) : 형태가 있는 것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지닌다. 단순히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소리, 냄새, 맛, 촉감을 포괄하는 일체의 감각적인 것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변화하는 물질적 성질의 전체이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 즉 물리적 요소를 가리킨다. 그래서 육신을 색신色身이라고도 한다.

수(vedan) : 느낌, 감수의 뜻으로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느낌을 수용하는 것이다.

상(saj) : 생각, 표상의 뜻으로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그것의 표상을 취하는 것이다.

행(saskra) : 형성, 결합의 뜻으로 감각 기관과 그 대상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행위 하고 작용하는 의지를 말한다.

식(vijna) : 의식, 식별의 뜻으로 대상을 구별하는 판단 이성의 작용이다.     


   여기서 온蘊(skandha, aggregates)이란 말은 “모여 쌓인다”라는 뜻으로 보통 ‘집합’이라고 말하지만, 실제적 의미의 사물의 집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유형(a type of process)’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끊임없는 흐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물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감각적 인상의 유동적 집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 심리적 존재물로서의 느낌이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수용하는 끊임없는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온설은 자연과학에서와 같이 순수한 대상으로서 인간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구체적 현실의 여러 측면을 파악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 가운데 색은 물리적 측면을 가리키고, 수, 상, 행, 식은 심리적 측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인간 존재를 정신과 육체라고 하는 이원적 실체에 의해 파악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즉 오온설은 인간의 전체 구성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문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오온이 인간인 것이 아니라, 오온이 있음에 의해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인간을 뜻하는 말인 ‘유정有情(sattva)’은 오온에 대해 탐욕하고 집착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깨닫지 못한 유정자는 오온에 집착해서 그것을 나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의 화합을 나라고 볼 때 인간은 색이라는 육체와 수, 상, 행, 식이라는 마음으로 구별된다. 이때 마음과 육체는 나라는 유기적 생명체 속에서 서로 의존하고 조건 지우는 관계로 파악된다. 이 관계는 우연적 관계도 아니며 인과적 관계도 아닌 상호 조건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난 신체도 없고 신체를 떠난 마음도 없다. 그러나 불교적 관심은 마음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생존 방식이 결정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모든 것은 마음을 앞세우며, 마음을 주로 하고,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마음을 밝게 하며 육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써, 화살을 맞았을 경우에도 육신의 고통은 느끼지만 마음의 고통은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는 내적인 안정을 기하여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보면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도 모두 무상無常하게 보인다. 나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라 불리는 것도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는 원숭이와 같이 잠시도 정지하지 않고 변한다. 또 오온의 어느 것도 나의 자유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없다. 몸을 병들지 않게 할 수 없고 마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온의 어느 것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온이 나인 것도 아니고 내가 오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내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요 오온 속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오온설은 어떤 것도 나라고 할 수 없다는 무아설無我說의 전제로서 설명된 것이다. 즉 인간의 변함없는 주체라는 개념을 없애기 위한 틀로서 제시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온 무아설은 실재하지 않는 실체적 나에 대해 집착하지 않음은 물론, 집착을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할 실천의 당위성을 일깨워준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이상인, 나에 대한 집착에서 따라오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잡아함경>에서 보면 붓다는 갓짜야나라고 하는 수행승에 대한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사람은 집착 때문에 결박당하고 있으나, “이것이 나의 아트만이다”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이 현실로 생하고 있을 때에는 괴로움이 생하는 것을 보고, 괴로움이 현실로 멸하고 있을 때에는 괴로움이 멸한 것을 보고, 미혹되지 않고 의혹하지 않으며,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여기에 지혜가 생한다. 이런 것만으로도 올바른 견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해탈(니르바나)이다. 해탈이란 인도에서 정신적인 해방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말이다. 붓다는 망집을 끊는 것으로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색, 수, 상, 행, 식에 집착하여 걸리기 때문에 “나는 있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것들에게 집착하여 걸리지 않는다면, “나는 있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한 쾌락과 좋은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니르바나의 경지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마음을 잘 써서 현세에 있어서 완전히 번뇌를 떠난 사람들은 항상 안온함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간의 집착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4. 해탈하는 여덟 가지의 길     


니르바나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길을 붓다는 사성제의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에서 제시한다. 그것은 여덟 가지 바른 길(팔정도八正道)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여덟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 올바로 보라(정견正見) : 아침 노을이 해가 뜨는 전조이듯이 올바로 보는 것(바른 통찰)은 행복과 구원에 이르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인생의 괴로움에 대하여, 사성제에 대하여, 무상함에 대하여, 또는 연기에 대하여 언제나 바르게 통찰해야 한다. 정견의 반대는 십이연기 가운데 첫 번째에 나오는 무명無明이다.


2. 올바로 생각하라(정사正思) : 바른 생각은 정진征塵하는 자의 성격을 특징짓는 기본 자세이다. 사람은 번뇌에서 벗어나고 노여움이 없으며, 해를 끼치지 않는 입장을 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올바로 말하라(정어正語) : 이것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윤리적인 기본 요구이다.


4. 올바로 행동하라(정업正業) : 이것은 윤리적 기본 법칙들의 실현을 포괄한다. 붓다가 금지한 사항들은 긍정적 자세를 통해 보완된다. 예를 들어 “살생하지 말라”는 금지의 계율은 “몽둥이나 칼 없이 부드러운 감정으로 자비롭게 모든 생물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하는 긍정적 자세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


5. 올바로 생활하라(정명正命) : 이것은 의․식․주를 구하는 방식과 관계한다. 자신의 생활이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제자는 다섯 종류의 일을 포기해야 한다. 무기라든가, 살아 있는 것, 고기, 술 같은 흥분제, 독 같은 것을 거래하는 장사가 그것이다. 노동의 산물이나 거래하는 물건이 다른 이에게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직업상의 거래에도 정직해야 한다. 사기를 치거나 감언이설로 남을 꾀어 이익을 내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단순히 이익만을 탐내는 마음은 피해야 한다.


6. 올바로 정진하라(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에는 네 가지 국면(사정근四正勤)이 있다. 사정근이란 네 가지 바른 노력이라는 뜻으로, 이미 생긴 악은 없애려고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는 악은 미리 방지하고,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게 하고, 아직 생기지 않는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7. 올바로 상념想念하라(정념正念):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특히 신체는 깨끗하지 못하며, 감각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항상 변화하며,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사념처四念處라는 수행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깨어나지 못하거나 구원되지 못한 인간은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진정 현재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탐욕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순간에 만족할 수 없다.


8. 올바로 선정禪定하라(정정正定) : 바른 집중은 의식의 첨예화로 묘사된다. 이것은 온 주의력을 특정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선禪의 과정이 일어난다. 바르게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삼매三昧라고 한다. 명상에는 사마디samadhi, 즉 삼매와 비파샤나vipasyana가 있다. 사마디는 마음을 집중, 통일시키는 수행이고, 비파샤나는 통찰하는 수행이다. 비파샤나는 특별한 방식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수행자가 마음의 모든 때를 벗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고요한 집중과 함께 바로 이 통찰로 인해서이다. 수행자는  집중과 통찰,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명상을 완성으로 이끈다.     


  지금까지 말한 여덟 가지 올바른 길 가운데 정견과 정사는 지혜知慧로워지는 길이며,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지키는 길이다. 그리고 정정진, 정념, 정정은 마음의 안정安定을 도모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라는 세 가지 공부(삼학三學)로 종합되기도 한다. 계학戒學으로 탐하려는 욕심을 이기고, 정학定學으로 성내는 마음인 진에瞋恚를 이기고, 혜학慧學으로 어리석고 우매한 상태인 우치愚癡를 극복하는 것이 말하자면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길이다. 탐貪, 진瞋, 치癡 세 가지의 잘못된 마음을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삼독은 본래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좋지 않은 생활 습관이 쌓이고 쌓인 결과로 생긴 업보이다. 그래서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서 탐, 진, 치의 마음이 계, 정, 혜의 마음으로 바뀔 때 인생은 고통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행복한 평화로운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어리석음을 딛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전미개오轉迷開悟라고 한다. 사성제 이외에 사법인四法印은 미오迷悟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모든 것에는 고정적 실체성이 없어(諸法無我), 영원불변하지 않다는 것(諸行無常)을 모른 채 어리석게도 일체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지만(一切皆苦), 그것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번뇌의 불꽃이 가라앉는다(涅槃寂靜)는 것이 사법인이다.  

  붓다의 교설은 소승小乘 불교를 지나 대승大乘 불교로 전개된다. 소승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수행의 과정을 4단계로 구분하고 그 위계에 이른 사람을 여러 이름으로 나타냈다. 제1위에 이른 사람은 수다원須陀洹이다. 인간세상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의 흐름에 방금 들어간 사람이라는 뜻으로 입류入流 혹은 預流라고도 한다. 제2위는 사다함斯多含이다. 이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단 한번만 다시 태어남을 보장받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인간세에서 이 과果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으로 가고, 다시 인간세로 돌아와 열반에 든다. 그리고 천상에서 이 과를 얻으면 반드시 인간세로 가고, 다시 천상에 돌아와 열반에 든다. 그래서 이 사람을 일왕래一往來 혹은 일래一來라고도 한다.  제3위는 아나함阿那含이다. 이 사람은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절단시킨 사람으로 사후에 색계, 무색계에 태어날망정 절대 두 번 다시 욕계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람을 불래不來, 불환不還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제4위는 아라한阿羅漢이다. 아라한은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자’ 혹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의미를 지닌다. 이 사람은 이미 학도가 완성되어 더 이상 배움이 필요없기 때문에 ‘무학위無學位’라고도 하고,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에는 태어나지 않음으로 ‘불생不生’, ‘살적殺賊’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라한은 부처는 아니다. 그 아래에 위치하는 존재다.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하는 소승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제기하면서 서력 기원전 1세기경부터 대승 불교가 등장한다. 대승 불교는 소승 불교가 스승이신 석가세존의 말씀만을 외우기에 급급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지혜를 계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소승 불교가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세상을 비관하며 현실을 도피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연약하고 불쌍한 대중들에게 대한 자비의 정신이 부족하며,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원력이 없이 자기 자신의 성불成佛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 불교는 성불하기 위해서 석가세존이 전생前生에 힘겹게 보살菩薩로서 걸어야 했던, 그 보살의 길을 중시한다. 보살은 보리菩提(bodhi 깨달음)를 향해 가는 중생(살타薩埵, Sattva, 살아있으나 아직은 잘못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보살은 자기도 아직 고통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으나 먼저 남을 그 고통 속에서 건져주려는(自未度先度他) 자비의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이런 보살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하고, 타인의 구제와 자신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정신으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

  보살은 보살의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그 실천 윤리가 여섯 가지 파라밀다波羅蜜多(pramit, 완성)이다. 이것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라는 여섯 가지 덕목의 완성을 말한다. 보시는 베풀어 주는 일로서, 법法을 가르쳐 주는 것, 값어치 있는 물건을 주는 것, 불안과 공포를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지계는 계율을 지킨다는 말이다. 인욕은 챤티knti라고 하며, 참을 인忍자는 용서를 빈다는 뜻이다. 정진은 붓다가 열반의 자리에서 그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타이른 말로 더욱 유명하다. 방일과 나태하지 말고 부지런하고 알뜰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선정은 단순히 세상을 버리고 고요한 곳에 머물며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위한 공덕을 이끌어 내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혜를 갖게 될 때 보살은 중생에게 참된 이익을 베풀어 줄 수가 있다.




■REFERENCE


▪고익진 공저, <불교의 진리관>, 경서원, 1982.

▪길희성, <인도철학사>, 민음사, 1984.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 편찬위원회,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1997.

▪이기영, <한국불교연구>, 한국불교연구원, 1983.

▪정승석, <인간을 생각하는 다섯가지 주제>, 대원정사, 1997.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08.

▪中村 元, 정태혁 역, <원시 불교>, 동문선, 1993.

▪三枝充悳, 김진무 역, <인간론 심리학>, 불교시대사, 1996.

▪E. Conze, Buddhism, Harper & Row, 1959.

▪Sarvepalli Radhakrishnan, 허우성 역, <인도의 인생관>, 서광사, 1994.

▪월폴라 라훌라, 진철승역, <붓다의 가르침>, 대원정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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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https://buddhism.lib.ntu.edu.tw/FULLTEXT/JR-MAG/mag602943.pdf


http://www.baekryunsa.net/ab-1064-9 검색어: 안수정등


http://www.hojodo.com/p/item-detail/detail/i37.html



안수정등 관련 이야기


안수정등(岸樹井藤)
岸=언덕 안
樹=나무 수
井=우물 정
藤=등나무 등


 

어떤 남자가 광야를 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 쫓겨 우물속으로 피하게 되었는데 우물안으로 드리운 칡넝굴에 매달려 밑을 보니 4마리의 독사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고 위에는 흰 쥐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남자가 매달린 칡넝굴을 쏠고 있는데 위에서는 덩굴의 벌집에서 꿀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생명이 위험한 상황을 잊고 꿀의 맛을 즐기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 비유하여 무상 및 무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이야기다.    

【안수정등(岸樹井藤)】
 현장법사의 전기에서 인명(人命)의 위태로움을 비유하고 있는 안수정등의 '안수(岸樹)' 즉 '강기슭의 나무'란 본래 대반열반경 1권에서 "이 몸은 마치 험준한 강기슭에 위태롭게 서 있는 큰 나무와 같아서 무너지기 쉽다. 폭풍을 만나면 반드시 쓰러지기 때문이다."고 설한 말씀에서 나왔다. 이 비유를 중국에서는 흔히 하유(河喩)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등(井藤)' 즉 '우물속의 등나무'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두 가지 기록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것은 안수정등에 관한 이야기는 많으나 이의 근거가 되는 출전(出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으므로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그 하나는 빈두로돌라사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羅闍爲優陀延王說法經)이다. 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우타연왕을 위하여 빈두로돌라사 존자(尊者)는 이렇게 설한다.


『대왕이여,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廣野)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때 크고 사나운 코끼리를 만나 쫓기게 되었습니다. 미친 듯이 달렸으나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때마침 언덕 위에 있는 우물을 발견한 그는 곧 우물 속으로 드리워진 나무뿌리를 잡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 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이빨로 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물의 네 벽에는 네 마리 독사가 있는데 그 사람을 물려고 합니다. 또 이 우물 밑에는 큰 독룡(毒龍)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옆에 있는 네 마리 독사와 아래 있는 독룡이 무서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뿌리는 뽑힐 듯이 흔들리고 그 때 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꿀 세 방울이 그의 입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때 나무가 움직여 벌집을 무너뜨렸습니다. 벌들이 날아와서 그 사람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또 들에 불이 일어나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를 태웠습니다. -중략-


대왕이여, 광야는 생사(生死)를 비유하며 그 남자는 범부(凡夫)를 비유하며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비유하며 언덕위의 우물은 사람의 몸을, 나무뿌리는 사람의 목숨을 비유합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밤과 낮을 비유하고 그 쥐들이 나무뿌리를 갉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순간순간 줄어드는 것을 비유합니다. 네 마리 독사는 사대(四大)를, 꿈은 오욕(五欲)을 비유하며 그를 쏜 뭇 벌들은 나쁜 생각과 견해(見解)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 들불(野火)이 타는 것은 늙음을 비유하고 아래 있는 독룡은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경이 설하고 있는 비유의 전모이다.


다른 하나는 이 비유를 압축한 기록으로서 번역명의집(飜譯名義集)이 전하고 있다.[괄호 안은 비유임]

『옛날 어떤 사람이 두 마리의 술취한 코끼리(生과 死)를 피해서 등나무(목숨의 뿌리)를 의지하여 우물(無常)에 들어갔으나 검은 쥐와 흰 쥐(달과 해) 두 마리가 등나무를 긁으려 하고 네 마리 뱀(四大)이 물려고 하며 아래는 세 마리 용(三毒)이 불을 토하면서 발톱을 펴서 잡으려 하였다. 그 사람이 위를 쳐다보니 두 마리 코끼리는 우물 위에 있어 의탁할 곳 없어 근심하고 있는데 홀연 지나가는 벌이 꿀방울(五欲)을 떨어뜨려 입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꿀을 맛보자 위태로움을 모두 잊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https://kin.naver.com/qna/detail.naver?d1id=11&dirId=110802&docId=59996457&qb=5bK45qi55LqV6Jek&enc=utf8§ion=kin.ext&rank=1&search_sort=0&sp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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