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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40 피터팬은 방을 구해주었다

더울땐 덥고 추울땐 춥던 어설픈 나의 첫 아지트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사건 등은 실제가 아닌 허구임을 분명히 밝혀둡니다.



세편의 다큐멘터리를 마치고 내 코너를 한지 1년쯤 되었을 때 통장에 천만 원 정도가 모였다. 고시텔보다는 원룸이라는 곳을 얻고 싶었고 그렇게 집을 찾아보게 되었다. 지금처럼 전세사기가 만연하던 시기도 아니었고, 내 집을 내가 구한다는 패기와 열정으로 직거래에 도전했다. 당시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 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틈날 때마다 들어가서 방을 봤다. 직방이나 다방같은 전문 매매 플랫폼의 초창기 모델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구한 나만의 첫 집에 대한 로망을 채우는 매물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았다. 살고 있던 고시텔 연장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몇 주도 채 남지 않았다. 초초한 하루하루 올라오는 방마다 부지런히 살펴보고 새벽시간까지 쪼개 집을 보러 다녔다. 


당시 내가 절대적으로 고수했던 기준은 밤거리가 어둡지 않은 곳, 관리인이 있는 곳 두 가지였다. 그 외에는 다 OK였다. 여자 혼자 사는 서울의 원룸이 위험하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대중교통 역에서 도보 5~10분 안팎의 밤거리가 밝고 유동인구가 많았으면 하는 그런 곳을 주로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이는 곳이 매물로 나왔다. 5호선 양평역에서 도보 5분거리 신축빌라, 깨끗한데 1000/40 관리비 포함, 관리인까지 있는 절대 놓쳐선 안 되는 곳이었다. 빌라 앞으로는 마트가 두 개나 있었고 주변 아파트 입주세대들이 항상 북적이는 밝은 곳. 조금만 걸으면 안양천으로 산책과 운동도 가능한 내 맘에 쏙 드는 곳이었다. 


양평역 앞 트럭에서는 공장 직매입 이불과 베개를 널어 놓고 팔고 있었는데, 계약을 하자마자 보라색 이불세트를 샀다. 5호선 지하철의 메인컬러가 보라색이라 양평역 앞 내 아지트를 기념하기에 딱이었다.   


하.지.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는 건 인생의 진리인가. 복층이었던 신축빌라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설계를 잘못한 건지 설비가 잘못된 건지 뭔가 이상하다고 한참 느끼던 어느 겨울날, 덜덜 떨며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다가 문을 두드리던 소리를 듣고 찬물을 뚝뚝 흘리며 나간 날 빌라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저 옆집 사람인데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옆집 이웃이라고 하는 여자는,

“혹시 뜨거운 물 나오세요?”

라고 했다.

그랬구나. 우리 집만 이상하던 게 아니었구나.


“아 혹시.. 그럼 거기도 안 나오나요?”

“지금 뜨거운 물도 물인데, 집이 너무 춥지 않아요?”

그랬다. 추워도 너무 추웠다. 

집에서 패딩에 담요에 장갑까지 끼고 타자를 쳤었는데. 왜 난 어디에라도 물어볼 생각을 안했던 건지.


“집주인한테 얘기할건데 같이 가실래요?”

그렇게 내 첫 아지트에 대한 피해보상과 보수가 시작되었다. 

웃풍을 막기 위해 침대에 보온장치를 덧붙이고 몇 달간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의 월세비용은 받지 않는다 했다. 


머리를 감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않아 오들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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