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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부엉 Feb 23. 2020

회사원이 되거나 기획자가 되거나

좋은 기획자가 되고싶은 주니어의 일기

회사에 들어온지 만 3년이 되었다.

내일은 대리 진급 시험을 보는 날이다. 실수해도 쉴드가 되던 사원 시절도 이제 곧 끝이 보이는 듯 하다. 아무것도 모른채 서비스기획팀으로 입사한 첫 날 파트장님께서 해줬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각난다. 

“기획자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설득해야하는 사람이야. 기획은 결국 작은 일이라도 왜 이것을 해야하는지를 고민하는데서 출발하는거야.”

화면에 버튼 하나를 추가하는 것도, 버튼의 위치를 상단에서 하단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 혹은 납득될만한 이유가 있어야했다. 지난 3년동안 나는 나 스스로를, 팀원들을, 파트장을, 팀장님을, 상무님을 설득하는 연습을 해왔던 것 같다.


기획하다 라는 동사의 의미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획팀에 가고싶었던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이거다. 회사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 중, 기획이 가장 상위의 레벨이라고 생각됬기 때문이다. 기획하다- 라는 동사는 무릇 무에서 유를 창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신규 비즈니스 창출! 과 같은 착각을 하게끔 한다(특히 막 졸업한 대학생의 눈에는). 그러나 실상은 가장 밑바닥에서 검토의 검토의 검토 과정을 거치며, 한 사람을 설득하고 다음은 두 사람을, 그 다음은 세 사람을 설득 (이라 부르고 컨펌이라 쓴다)하는 일이 본질이다. 무에서 유로 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지난해서 중간에 엎어지는 일도 많고, 설득하기 위해 이리저리 타협하다보면 산으로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니어의 입장에서 지난 3년을 돌아보면 기획하다는 곧 설득하다 라고 해석해도 정말 과언이 아니다.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써 섬세한 시각이 필요하기에 그런 것이라는 건 알고있지만 말이다. 입사 첫날 파트장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래서일 것이다.


나쁜 습관 1 : 야부리 좀 털어볼까

설득해야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나도 모르게 생긴 습관이 있다. 바로 일명 기획서에 야부리 털기. 좋게 말하면 보고서로 설득하는 플로우를 익힌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다르다. 이 기획을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msg 치는 법을 배워버린 것 같다. 조미료는 확실하긴 하지만 실체가 없는 치트키이고, 맛은 있지만 금새 물리기 마련이다. 이유라기에는 너무 거대한 시장의 흐름을 근거로 들고 장담할 수 없는 기대효과에 공을 들이는 나를 보며, 내가 정말 제대로 된 기획을 하고 있는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한번에 컨펌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때면,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보고처돌이가 되가는 건가 라는 생각에 경계 태세를 갖추게 된다.


나쁜 습관 2 : 보다 보니 마음에 들어

나도 어쩔 수 없는 회사원이다 보니, 내 안에서 스스로 발화한 기획 요건보다는 탑 다운으로 떨어지는 요건에 치이는 경우가 많다. 오더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그대로 실행할 수는 없으니, 나름 검토를 하고 상위기획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꾸만 검토 결론이 긍정적으로 흘러가 버린다. 왜 이 요건이 떨어졌을지 고민을 하다보니 이유를 알겠고, 생각을 하다보니 납득이 가고, 세상 찬란한 기대효과가 있을 것만 같고 (aka. 야부리) … 고민을 하고 기획서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길수록, 자꾸 긍정적으로 검토 결론을 내리게 된다. 분명 그렇지 않은 요건도 있을 텐데 말이다. 기획으로부터 시작되는 ‘일’ 이기에 결과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모든 기획에 WHY를 물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탑 다운으로 떨어지는 요건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YES에 맞추려는(?) 나를 보면 또 한번 경계 태세를 갖추게 된다.


나쁜 습관 3 : 그냥 시키는대로 할래

기획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기획자의 일이라지만, 그 해답의 여정이 너무 길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멈춰서서 여기가 정답이야! 하고 포기해버리는 때가 있다. 기획서를 리뷰하다보면 나 혹은 상대가 서로 납득할 수없는 지점이 한 두개쯤은 생기기 마련이다.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상대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어쩌면 그 포인트가 기획을 좌우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수있기에 더욱 치열한 티키타카가 필요한데, 나는 일단 일이 진행이 되야한다는 이유로 쉽게 타협해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저 파트장님이 시키는대로, 팀장님이 코멘트준대로, 또 다른 누군가가 시키는대로… 그냥 일단 시키는대로 할래- 라며 티키타카의 끈을 팍 끊어버리는 것. 상사의 의견에 쉽게 저버리는 나를 보며 또 다시 경계 태세를 갖춘다. 이렇게 회사원이 되어버리겠구나.


회사원이 되거나 기획자가 되거나

기획의 일은 생각보다 너무 잡다해서, 기획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스스로 자꾸 적립해나가지 않으면 정말 잡다한 일을 하는 그저 그런 회사원이 되고 만다. 언제나 기획하다의 의미를 생각하며 일하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 보고처돌이가 되고, 예쓰맨이 되가고 있다. 일 한지 이제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렇게 고인물이 되가는 건가 (후비적ㅎ)

최근 들어서부터 누군가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회사원이라고 하지 않고 기획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회사원이 아니라, 기획자로 남고 싶어서 스스로 되내이는 말이기도 하다. 주니어의 옷을 슬슬 벗어가는 올해는 까딱하다 회사원으로 남기 쉬운 이 나쁜 습관들을 계속 경계하며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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