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가방을 만들어 본 경험은 없습니다
상품기획 MD로서 비교적 다양한 아이템을 해보았다. 데님 아이템을 맡았을 때는 청바지를 위주로 청자켓, 청치마 등 데님 소재로 만든 옷들을 기획했었다. 1년에 매출 200억 정도의 규모를 기획했었다. 그리고는 패션 브랜드에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이직하고 소형가전 상품기획을 했었다. 소형가전을 하며 TF형태로 온라인전용상품 출시를 위해 옷걸이, 휴지통 등도 기획을 했었다. 연 100억 정도 규모였다. 지금까지 데님 의류, 소형가전, 리빙 아이템을 경험했었는데 ownscale 이라는 브랜드의 첫 아이템으로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가방'을 선택했다. 무모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생각했을 때는 첫 시작으로 적절한 아이템이다.
우선 가방은 사람들이 매일 들고 다니는 친숙한 아이템이다. 당연히 나에게도 매우 친숙한 아이템이고 다양한 종류의 가방을 가지고 있다. 토트백, 크로스백, 백팩, 운동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간단한 가방, 숄더백, 미니백 등 골프백 말고는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가방은 출근할 때나 놀러 갈 때 대부분 가지고 다니는 아이템이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카페에 올 때도 'suffice bag(가칭)'을 만들 때 참고할 샘플 가방을 들고 왔다. 옷은 매일 바꿔 입더라도 가방은 상대적으로 덜 바뀐다.(남자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한번 사면 자주 들고, 오래 드는 '가방'이라는 아이템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구매하는 아이템 중 가장 오래쓰고,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영향력이 꽤 큰 아이템인 것 같다. 그래서 좋은 가방을 만들고 싶다.
내가 기획한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면 매우 신기하면서도 뿌듯하다. 내가 A-Z까지 기획한 첫 청바지를 사람들이 매장에서 웃으며 계산하는 모습을 보거나, 내가 기획한 상품 너무 좋다며 남겨 주신 별 다섯개짜리 리뷰를 보면 기쁨과 보람을 함께 느낀다. 계절이 바뀌어도 가방은 잘 안 바뀌니 다른 아이템보다 내가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목격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매우 기뻐하며 반드시 그에게 고맙단 인사를 직접 건낼 것이다. 그날 기분이 좋아 평소 없던 용기가 생긴다면 그에게 가방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볼 것이다.
가방은 친숙한 아이템이긴 하지만 막상 마음에 썩 드는 가방을 찾기는 꽤 어렵다. 그리고 가방을 어디서 사야하는지도 애매하다. 좋아하는 브랜드여도 마음에 드는 가방은 잘 없다. 어떤 가방은 생김새가 마음에 드는데 실용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안 주머니가 아예 없거나, 너무 무겁거나 그런 식이다. 반면에 어떤 건 너무 실용성만 추구해서 모양이 아쉬운 것도 있다. 어떤 건 다 마음에 들어도 '아니 내가 이걸 이 가격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비싸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건 또 너무 유명해서 80년대 고등학교 교복 가방처럼 자주 보이는 가방이 있다. 이런 것처럼 내가 가진 가방들도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있다. 프라이탁은 너무 캐쥬얼해서 격식을 차리는 자리엔 아쉽다. 포터는 훌륭한 가방이지만 요새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고 가격이 점점 산으로 간다고 느끼고 있다.(미리 사두길 잘했다) 질스튜어트의 가죽 가방은 만듦새도 괜찮고 가격도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이다.
이렇게 보면 너무 까탈스럽다 생각할 수도 있다. 맞다. ownscale의 페르소나인 '카이(kai)'는 그런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브랜드에서 가장 기쁘게 하고 싶은 고객이 그런 사람들이다. 까다로운 페르소나이기 때문에 자칫 일관성이 없고, 제 멋대로일 것처럼 보일까봐 카이라는 페르소나의 가치관을 글로 정리하여 gpt에 학습시켜 두었다. 어떤 사람을 위한 브랜드일까를 상기시키기 위해 gpt에게 다시 물어보기도 한다.
카이의 페르소나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성향인 것이 보인다. 카이는 가방 하나를 살 때도 꽤 많이 고민하는 성격이다. 그런 카이를 위한 가방을 만들려는 것이다. 카이는 까다로운 취향이지만 그의 취향이 반영된 아이템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높은 기준이 된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가지고 다니는 아이템은 명품은 아니데 뭔가 쉽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고 뜯어 볼수록 나도 쓰고 싶은 아이템을 쓰는 사람들. 사회 초년생이 보면 이른바 '멋진 어른'이 들고다니는 아이템이다.
나는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는 카이가 기쁘게 들고 다닐만한 가방을 만들고 싶다. 멋진 어른이 들고 다니는 오래도록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멋이 쌓여가는 아이템을 만들고 싶다.
이제는 클래식이 되어 버린 유명한 그 말 "답답하면 니들이 뛰든가"의 정신을 이어 받아 내가 직접 가방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느냐, 나에게 쉬운지 어려운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할 수 없는 일이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진정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잘게 쪼개며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큰 열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진심이라고 해도 그것은 사업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사업으로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짝사랑과도 같다.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있든 상대가 좋아해 주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내가 상대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좋은 사람의 소양을 갖춰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더 나아가 아주 기뻐할 만한 가방을 만들어야 나의 목표가 이뤄질 것이다. 그럼 나는 그런 가방을 만들만한 능력이 있을까?
누군가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해봐야 퇴직하면 쓸모 없는 죽은 지식이라고들 하지만 난 운이 좋아 회사 밖에서도 쓸 수 있는 좋은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상품 기획자로서 여러 아이템을 기획 하다보니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공통 요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상품을 기획할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잊지 않고 가방을 만들 때도 타협하지 않고 소처럼 묵묵히 하다 보면 분명 좋은 가방을 만들 거라 확신한다.
✅ 누구를 만족시키고 싶은지 타겟을 명확하게 잡아야 한다
✅ 그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아야 한다
✅ 이것을 알기 위해 그 사람들이 자주 사는 것들의 아이템들을 리뷰하고 장단점을 파악해야 한다
✅ 아이템의 장점과 리뷰를 보며 기획하는 아이템에서 무엇을 반영하고, 무엇을 뺄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 이 수익이 날 수 있도록 아이템의 value들을 잘 조합하여 원가, 판매가, 발주량을 정해야 한다
✅ 이 value에 나의 직관은 반영될 수 있지만 타겟 고객의 목소리가 70% 이상은 들어가야 한다
✅ 어떻게 알리고, 어디서 팔고, 남으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판매 계획을 미리 세워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긴 하다. 저 하나 하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고 그 대답을 실제 샘플로 구현해 내고 샘플을 대량생산 때까지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잘 설계된 가설과 질문, 대답, 타협하지 않는 실행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무슨 일이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좋은 제조공장'을 찾는 것은 걱정이 된다. 나는 제조처를 아는 곳이 하나도 없다. 가방 제조와 관련된 인맥이 전무한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가방을 기획 의도 그대로 샘플을 만들고, 본 물량 생산의 퀄리티까지 컨트롤 해줄 제조사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기획은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할지 감이 잡혀 두렵진 않은데 제조공장과 관련된 부분은 막막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유튜브를 검색하기도 하고, 제조처들이 모여 있는 네이버카페를 검색하여 들어가기도 하고, 이번에 '맨땅에 제조'라는 책을 구입하여 읽어 보려고 한다.
회사 생활을 10년 하며 '일을 잘하는 능력'보다 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원래는 하나도 모르고, 한심할 정도로 못하는 경지였던 것들을 어느새 제법 완숙하게 할 수 있는 끈기를 길렀다는 것이다. 지금 못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내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