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이 나를 키운다
나는 다운 시프터다. 빠르게 내달리던 삶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산 아래 작은 텃밭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강남의 작은 집에서 질식하듯 지내던 어느 날, 당근마켓의 '부동산'에서 텃밭이 달린 방 4개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날 바로 집을 보러 갔고, 계약을 했다. 강남집과 모든 점이 다른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만의 작은 정원을 꽃과 나무로 꾸며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계절 내내 알록달록 빛나는 공간으로 남천, 산사, 라일락, 타임을 심으려고 계획을 세웠고, 이미 내 텃밭은 머릿속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모두 보냈다. 계약서를 쓰러 다시 홍은성을 방문했을 때 이 계획은 끝나버렸다. 집주인 할아버지께서는 “이쁜 가족 같은 친구가 온다”며 텃밭에 거름과 함께 작물을 심어주셨다. 순간 너무 속상했다. 내가 새로 시작하려던 삶에, 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온 걸까?
"아이고."
"왜 그려?" 할머니가 물었다.
"아, 제가 심으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뿌듯하게 웃으며, 당신께서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도 안 고맙다고요'라고 속에선 외쳤지만, 겉으론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마당에 나가 녀석들을 자세히 바라봤다.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상추들과 고추에 할아버지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환영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차가웠던 마음에 틈이 생겼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밭은 숨겨둔 선물처럼 자꾸 뭔가를 틔웠다. 처음에는 대추와 오가피나무, 집주인 할아버지께서 심어주신 상추와 고추뿐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깻잎이 피고, 민트가 올라오고, 오이와 호박은 넝쿨을 타고 오르고, 오디까지 나온다. 계획된 정원은 아니었지만, 뜻밖의 풍요였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밭에 물을 줘야 하는데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햇볕이 강한 대낮에는 물을 주면 이파리가 타기에, 해가 뜨기 전이나 해질 무렵에 줘야 했다. 그런데 늦은 밤에는 습기를 좋아하는 벌레들이 밭에 집을 만들까 봐 새벽마다 일어나 물을 줬다. 내가 원한 자연과 함께하는 삶인데 영 피곤했다. 자연은 내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 계획과는 다른 루틴이지만 이게 더 생명력 있는 현실이었다. 하루의 시작이 빨라졌기에.
고추는 꽃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서 열매가 자라는 줄 알았는데, 꽃을 밀면서 매달고 자란다. 반쯤 자라난 고추 끝에 꽃잎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턱받침 하고 제 손으로 밥을 먹는 아기처럼 기특했다. 자라는 아기 고추는 나보다 더 단단했다.
강남에서는 TV 소리에 묻혀서 밥을 먹었고, 홍은성에서는 이파리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식사를 한다. 나비와 새와 인사하며 하루를 맞이한다. 하루 다르게 쑥쑥 자라는 고추와 상추도 기다려지는 반가움이다. 냉장고가 없는 이곳에서 배가 고프면 밥을 안치고, 상추와 깻잎, 오이를 따다가 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훌륭한 한 끼가 된다. 된장찌개를 먹을 때도 별다른 재료 없이 갓 딴 고추와 깻잎으로 시원한 국물 맛을 만들 수 있다.
강남을 벗어났을 뿐인데, 자연인이 됐다.
물 주고, 벌레 쫓고, 새벽에 일어나 밭을 돌보는 일은 번거롭지만 그 사이 나는 부지런히 살아났다. 도시에서 내 쉼을 방해하던 건 빠름이 아니라,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 ‘기계적인 나’였다.
고추는 라일락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여름을 버티며 단단하게 자란다. 이 고추밭에서 조심스레 나를 다시 키워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