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완벽주의 엄마라서
처음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그런데 그 분노의 수위가 일반적인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꼭 내 심장에 누군가 불을 질러놓은 것처럼 속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아빠의 영정사진을 찾으러 아빠가 살던 나의 예전 집으로 갔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히 평화롭게 잘 있는 아파트를 보고 그것이 활활 불길에 타오르다 폭발하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장례식에 조문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밥 먹고 떠드는 사람들이 벌레 같아 보였고, 발인하는 날 아빠의 관을 묻으러 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 버스가 뒤집어져서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의 비둘기들을 보면 총을 가져와 다 쏘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작은 개를 별 이유도 없이 바닥에 내팽개치기도 했다. (그리고는 나도 깜짝 놀라 바로 시댁으로 보내버렸다) 친정에서 기르던 10년 된 개도 꼴 보기 싫어져서 그 뒤로 한 번도 손길 한번,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같이 살던 주인이자 가족이 죽은 줄도 아는지 모르는지 잘 먹고 잘 돌아다니는 개들이 바보 같아 보였고 미웠다.
길에 돌아다니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만 보아도 마음이 날카롭게 죄여 왔다. 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고 더욱더 불행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 혼자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지하세계에 떨어져 갇혀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나만큼 불행하지 않다고 느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중 가장 큰 분노폭발의 대상은 남편.
아마 내가 가장 믿었고 의지했던 사람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딱히 사위로서 남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나름대로 자기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했던 것 같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 사람의 감정 때문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만큼 슬퍼야 되는거 아니야?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소울메이트-마음과 영혼의 단짝이라고 믿었는데 전. 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남편이 나를 철저히 배신한 것만 같았다.
내가 그때까지 알던 사랑은 여고생이 단짝친구한테 느끼는 애착 정도? 친밀감과 동질감, 소유욕이 섞인 그런 유치한 감정이었던 것이다.
남편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을 퍼부으며 그것도 모자라 죽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며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어느 날은 부부싸움 끝에 벽에 걸리 제일 큰 결혼 액자를 깨트려버리고 난 뒤, 신혼집답게 하얗고 곱게 달아놓은 커튼을 보며 저것도 불에 태워버려야겠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때 내 모습을 보면 두 눈이 악마처럼 시뻘건 색이었지 않았을까)
그 순간, 그렇게 반쯤 미쳤던 나를 진짜 미친 짓을 실행하지 못하게 탁! 잡았던 건 바로 나의 아기 꼬물이의 존재였다. 내가 30세가 돼서 아빠가 없어져도 이렇게 괴로운데 저 아기에게 아빠가 없어도 될까?
내 딸에게 최소한 다 클 때까지라도 온전한 가정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 다행히 당장 불을 질러야겠다는 충동보다 그 의지가 더 컸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가 정상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아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과에 갔다.
거기서 온갖 검사를 다 해 보고는 하는 말이 지금 전두엽(이성적 사고 기능을 담당하는 곳) 이 완전 쪼그라들어 있긴 한데, 가족이 죽은 뒤 2달 정도는 쇼크 상태가 오는 것도 정상적인 애도반응에 들어가니 그 이상 지속 되면 약물치료를 고려해 보라고, 그냥 보내는 거다.
집에 오니 엄마도 나에게 하는 말. '네가 약을 먹어 괜찮아지면 내가 백 번 천 번이라도 몰래라도 약을 먹이겠다'라고. 그런데 '약 먹어서 될게 아니라서 더 큰일'이라고.
하지만... 꼬물이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비록 돌연변이일지라도 엄마라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