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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아이 Oct 26. 2023

종이인간

엉망진창 완벽주의 엄마라서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사람은 그냥 종이 한 장이 아니라

피와 살과 뼈가 있던 인간이었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오니 날아가 버렸고

비가 쏟아지니 젖어 버렸고

태풍에 쓸려 들어가더니 없어져 버렸다.

종이 한 장처럼..

참 이상하지?

종이가 아니라 인간이었는데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기침감기가 오래 가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폐에서 시작된 난치병이었다. 왜 그런 병이 생겼는지, 왜 하필 우리 아빠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아플지, 언젠가 나을 수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약도 매일 아침저녁 한 움큼씩 털어 넣으며 버텨야 했다. 부작용으로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기도 했고, 온몸의 근육이 빠져서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숨을 쉬는 것도 가쁘게 쉬어야 하고 하루종일 기침을 했다.


아빠는 원래 놀기를 엄. 청. 나. 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높은 곳이 보이면 꼭 올라가서 균형 잡기를 했고, (심지어 놀이터 철봉, 남의 집 담벼락, 난간 위에도. 엄마는 당연히 질색했지만) 새벽부터 총을 메고 산에 가서 사냥도 하고, (죽은 꿩을 그대로 집에 들고 와서 엄마는 질겁했지만) 20년 가까이 반나절 꼬박 테니스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공을 쳤다. 주말이 되면 우리 가족들을 다 데리고 산으로 계곡으로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나중에는 농사를 지으며 나무랑 동물을 기르며 사는 것이 아빠의 꿈이었다. 우리 3명 공부 다 시키고 다 키워서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될 때가 오면 그렇게 더. 실. 컷. 하. 루. 종. 일. 노는 것이 아빠의 계획이었다.


원래 워낙에 잘 놀고 잘 떠들었던 우리 가족들은 아빠가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래도 웃으며 지냈다. 괜찮겠지, 나아지겠지, 지금보다 더 안 아프면 된 거야 하면서.

나도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천하무적 까불이 아빠가 언젠가는 자신이 그리던 빅 픽쳐대로 할아버지가 돼서 농부가 되고야 말 줄 알았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픈지 10년 만에 그렇게 떠날 줄은 정말 몰랐던 거다.


한 인간의 존재가 어느 날 그냥 없어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일까?

종이 한 장이 휙- 바람에 날아가듯 가버릴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가벼워도 되는 것일까?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아빠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근육이 다 빠져 추위를 많이 타는 아빠가 발이 시릴까 수면양말을 사서 신겨드리고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는 기도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쩐지 며칠 전 아빠한테 편지를 한통 써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는데(평생 처음으로) 더 이상 아빠는 눈으로 내 편지를 읽지 못했다. 이제는 아빠에게 감사하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이것도 처음으로) 더 이상 아빠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힘들어 숨쉬기 고통스러워하는 아빠의 상태를 봐서 코마 상태에서 집중치료를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중환자실로 이동하기 직전에 딱 한번 처음으로 아빠의 퉁퉁 부은 손을 만져 보았다. 이제 저기로 들어가면 살아 돌아올지 못 돌아올지 모르는 거다. 나는 아빠의 손목에 달려있는 환자번호가 쓰인 작은 종이에 정신없이 뭐라고 썼다.


이 세상에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즐거움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그 말, 사람들이 기쁠 때는 오만해지지 않고 겸손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울 때는 용기를 가지고 이겨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전설 속 신비의 문장.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거 말고는 아빠의 고통과 두려움을 같이 나누어 가질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커서 아빠에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 애정표현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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