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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Jun 10. 2023

그릇장

 그릇장을 만들고 있다. 장을 받치는 하부와 그릇을 보관하는 상부를 분리해서 만드는 계획인데 내가 일하는 방식이 더디다. 세부의 크기와 치수를 고민하는데 도면을 그리는 과정에서 그 치수를 결정하지 못해 늘 망설인다.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결합을 위한 장부는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크기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의 고민 앞에서 항상 멈칫거린다. 쉽게 결정짓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굴리는 시간이 길다. 







 어렸을 때도 비슷했다. 만화책을 좋아했는데 만화를 보면서 한글을 배웠고 웃음과 슬픔의 감정도 알았다.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고르는 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져 주인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도 많다. 수업 재료로 월넛을 받았다. 한정된 재료 안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과정인데 처음 이 목공수업을 신청하면서 생각한 것은 작은 가구를 만드는 공방을 차리면 좋겠다는 것이다. 의자는 어렵고 책상은 크기도 크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집안일을 하다 보면 싱크대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법 있는데 항상 싱크대가 아쉬웠다. 상부장에서 접시와 그릇을 꺼내는 동작도 불편하고 높이도 애매하다. 게다가 그릇들이 쌓이면 무게도 만만치 않다. 해서, 바닥에 놓을 수 있는 작은 그릇장을 만드는 일로 공방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과제를 내 공방에서 만드는 첫 제품이라 설정하고 일종의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싶었다. 집안에 두고 사용해 보면서 개선점을 살피려는 생각이다. 시간이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 주겠지.  








 수업 재료로 받은 나무는 이미 다 써버렸고 그마저도 다리와 장이 어울리지 않아 다시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리는 월넛으로 하고 장은 레드오크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는데 완성된 다리 위에 레드오크로 만들고 있는 장을 올려서 살폈다. 두 부분의 색과 질감이 어울리지 않는다. 머릿속에서는 노란색이 도는 레드 오크의 질감과 짙은 브라운 색이 괜찮을 것 같았는데 뭔가 이질적이다. 따로 논다고 해야 하나? 어제저녁에도 고민하고 아침에 차 타고 출근하면서도 생각했다. 어울리는가 아닌가의 판단은 거의 3초 안에 끝난다. 아니다 싶은 것을 붙들고 있어 봤자 결국엔 아쉬워진다. 딱 맞는 만족감에 도달하는 경험이 이런 일의 매력이다. 적당히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바라는 어떤 지점에 정확히 꽂히는 경험도 중요하다. 








 월넛으로 만든 다리는 일단 치워두고 레드오크로 다시 만들기로 결정했다. 돈이 들어가서 그렇지 이런 판단은 쉽다. 월넛과 함께 받은 라왕 합판도 있는데 이것으로는 대패나 끌 등, 자잘한 수공구를 보관하는 캐비닛을 만들려고 한다. 역시 결정해야 할 정확한 치수 앞에서 헤맨다. 도면을 그려봐도 정확하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게 내가 일하는 방식의 걸림돌이다. 너무 늦다. 








 폭이 340이냐, 370이냐, 400이냐? 높이는 640으로 할까 750으로 할까? 아니면 900? 최종 높이를 840 정도로 잡았다. 사실 이것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지만 대략 이 정도 선에서 결정하자. 고민이 길면 일하는 시간만 촉박해진다. 서랍의 크기는 어떻게 하고 문은 어떤 방식으로 할까? 생활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디테일들이 만드는 과정에서는 뒷덜미를 잡아끈다. 


 여름이 시작됐는데 마냥 고민만 하고 있을 순 없으니 일단 합판을 잘랐다. 공구함 용도의 캐비닛은 어렵게 하기 싫어서 비스킷으로 결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공구함의 포인트는 문인데 프레임은 합판을 노출시키고 문은 합판 위에 칠을 할 계획이다. 옻칠의 질감이 매력 있어서 좀 알아보고 물어보고 했다. 경험이 없으니 망설인다. 그냥 페인트로 칠하고 적절한 무늬를 넣을지, 옻이 오르거나 망칠 경우를 열어놓고 자개를 붙이고 옻칠을 할지. 


할 일이 많다.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모양들이 어수선하고, 손은 느리고, 마음은 내가 바라는 꼭 맞는 상태를 잡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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