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by 오동


어제 퇴사를 했다. 1년 전에 입사한 회사다. 말이 좋아 회사지 물류센터다. 대형 화물트럭이 드나드는 거대한 창고에서 사람들이 주문한 물건을 상자에 담아 택배로 보내는 일을 했다. 법무사 자격증을 따기위해 공부하는 아내와 고3인 아이가 있어서 1년만 잘 버티자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돈 버는 재주가 없어서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심지어는 노가다 일도 잘 안 됐다. 진입장벽이 거의 없는 일이 노가다 계열이다. 발을 담그긴 쉬워도 버티고 자리 잡는 건 만만치 않다. 물류센터 일도 비슷했다. 진입장벽이 없기에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섞여 있었다. 최저 임금을 받는 일이다. 머리 쓸 필요도 없고 그냥 정해진 역할에 따라 물건을 옮기고 포장하고 뭐 그런 일이다. 내가 맡은 역할은 출고 파트였기에 마감 시간에 맞추려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정도.


2014년에 집을 떠나 집 짓는 목수 일을 시작했다. 현장이 주로 지방에 있기에 옮겨 다니는 삶이었다. 2주에 한 번 꼴로 집에 다녀오면서 양평, 제주도, 장흥, 산청, 강화도, 강릉 등 지방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일을 마치면 술을 마시면서 떠들었고 잠이 들면서 과거를 후회했고 아이와 아내를 생각했다.


주차를 하고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회사를 향해 걸었다. 바닥을 보면서 걷다가 멀리 앞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내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츄리닝에 안전화를 신은 사람들이 많다. 밤을 새우는 물류센터의 특성에 따라 편한 옷을 입는다. 나도 1년 내내 같은 바지에 비슷한 티셔츠를 입었다.


이곳을 떠난다. 지난주에 아내의 시험 결과가 나왔다. 발표날이라 시간을 재며 기다리다가 6시가 넘었는데도 별 소식이 없기에 옆동네 중국집으로 갔다. "짜장면 짬뽕 먹으러 가자". 동네 맛집이라 시간대를 놓치면 재료가 떨어지거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먹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사람 몰리기 전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하고 폰 만지작 거리다가 혹시나 싶어 합격자 발표 소식을 찾았다. 합격자 수험번호 명단이 떴다. "자기야, 발표 났어" 아내에게 말했다. 전화기 창을 여는 아내의 손을 보다가 눈을 떨구고 식탁을 바라봤다. 눈에 들어오는 건 없고 아내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나 합격했어". 작은 소리였다. "엄마 축하해". 아이가 아내를 안아주고 나도 아내의 손을 잡았다. 작은 중국집 안에서 소리를 낮추고 나와 아이가 아내를 축하해 줬다.


1년 10개월 동안 아내의 수험생활을 바라봤다. 아이의 입시도 지켜봤다. 아이는 대학에 떨어졌고 아내는 시험에 붙었다. 이제 법무사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하루는 물류센터로 출근하려고 현관에서 안전화를 신고 있었는데 아내가 내 손을 잡으면서 "내가 거기서 꺼내줄게"라고 말했다. 말이라도 고마웠고 정말 누가 꺼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다. 육체노동으로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저녁 6시에서 새벽 4시까지 일을 했지만 최소한의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빠듯하게 버텼다. 밤과 낮이 바뀌면서 몸이 상했다. 이전에는 아프지 않던 부위가 번갈아가면서 아팠다. 어깨, 팔꿈치, 발목, 눈이 침침해졌고 목소리가 쉬었고 거울을 보면 푸석한 늙은 남자가 있었다.


합격 소식을 여러 번 확인했다. 모니터에 뜬 수험번호를 보고 또 보면서 가만히 안도했다. 비유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터널의 끝을 내 손으로 더듬는 기분이었다.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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