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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식 횡단보도

결합

by p id


고원식 횡단보도

결합

도로가 잘 정비된 도시를 거닐면 구도심과는 조금 다른 횡단보도를 자주 볼 수 있다. 옛날 횡단보도는 평평한 도로에 흰색 선을 그어놓은 형태라면, 새로운 횡단보도는 도로가 볼록하게 솟은 형태이다.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횡단보도에 과속방지턱의 기능을 결합한 결과물이다. 솟아오른 형태에서 비롯해 '고원식'이라고 부르는 이 횡단보도는 차량이 횡단보도에 접근할 때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도록 만든다.


고원식 횡단보도는 기존 횡단보도의 여러 단점을 보완한다. 차량이 인도에 진입하기 어렵게 하기 위해 차도는 인도보다 한 단계 아래 레벨에 위치한다.


기존 횡단보도는 차도와 같은 레벨에 있기 때문에 휠체어 사용자가 횡단보도를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도를 횡단보도 앞에서 경사지게 만들었다. 횡단보도가 인도와 수직으로 만나기 때문에 횡단보도에 접하는 지점을 기준으로 인도에 방사형 경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면 보도블럭을 시공할 때도 번거롭고 인도에 갑작스러운 경사가 생기며 보행자는 연속된 평지를 걸을 때에 비해 불편을 겪는다.


그에 반해 고원식 횡단보도는 인도는 그대로 두고 횡단보도를 인도와 같은 레벨로 올렸기 때문에 보행자는 횡단보도 앞을 지나가며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되고, 차도는 횡단보도와 한 방향에서 만나기 때문에 시공의 어려움도 없다.


차량이 횡단보도에 근접하는 지점에 이전 글에서 얘기한 사괴석을 배치하거나 운전자가 횡단보도가 고원식임을 즉각 인지할 수 있게 경사면에 색상을 부여한 사례도 있는데, 일반 고원식 횡단보도에서 한 단계 더 성능이 업그레이드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당위성

고원식 횡단보도는 훌륭한 결합의 형태지만 모든 결합이 올바르진 않다. 우리는 '결합에 당위성이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많은 디자이너와 발명가들이 인간의 삶을 더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새로움을 위한 목적으로 결합을 시도하곤 한다.


지역 특산물의 모양을 한 가로등이라든지, 정수기와 가습기가 합쳐진 이름 모를 물건이라든지(아무렇게나 생각한 예시일 뿐이다.), 길을 다니다 보면 만든 이의 의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산물을 홍보하는 효과가 생기기보다 경관을 어지럽게 만들거나 운전자의 시야를 빼앗아 안전을 위협하는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고, 건조한 장소가 아닌 물을 따라 마실 수 있는 장소에서만 가습이 가능한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도로 설계자들은 '차도를 건너는 보행자를 보호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횡단보도와 과속 방지턱 모두 같은 목표를 위해 만들어졌다. 횡단보도 앞에 과속 방지턱을 설치할 수 있지만, 두 요소를 합침에 따라 도로 위에 시설물의 다양성을 압축할 수 있게 되어 유지보수가 편해졌으며, 시공 편의성, 보행자 편의성을 확보했다. 말 그대로 효과적인 조치이다.


디자이너는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 결합은 기존에 있는 요소들을 합치는 1차원적 아이디어이므로 단순한 방식인 만큼 좋은 결과물을 기대하기 힘들다. 결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는 진짜로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지 고려해봐야 한다.


고원식 횡단보도는 기존 횡단보도의 여러 단점을 보완하며 보행자 안전이라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때문에 훌륭한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길을 가다 고원식 횡단보도를 볼 때, 보행자 안전을 위한 디테일한 노력들이 녹아들어 있음을 눈치채고 시민을 향한 배려심이 녹아있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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