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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Dec 13. 2023

딱 만 원짜리 고민

"이건 며칠짜리 고민이었어?"


아침 7시 반쯤,


방문이 열리는 조용한 인기척에 실눈을 떠보니 조명을 등지고 5학년 딸아이가 들어오는 게 보인다.

"으음.. 지온이 일어났어..?"

"엄마 일어나 보세요"

"으응 알겠어 잠깐만..."

라고 말하곤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누워버렸다. 지온이는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가 오 분여 가량이 흐른 뒤 다시 들어왔다.

"엄마 일어나 보세요"

"알겠어 기다려봐.. 엄마 잠 좀 깨 볼게"

하고  드러누웠다. 지온이는 문을 닫고 나갔다가 또 몇 분 가량이 흐른 뒤 다시 들어와 말했다.

"엄마.. 일어나 보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아.. 무슨 일이 있구나...!' 

그 즉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아이를 따라 주방으로 나갔다.



"왜에 지온이 무슨 일 있어?"

하고 묻자 아이가 주방바닥에 앉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같이 주저앉아 아이의 눈을 맞추며 다시 물었다.

"엄마 그게요.."

"괜찮으니까 말해봐"

"엄마 그게요.."

"응 천천히 말해봐 엄마가 기다려줄게"

"토요일에... 친구들을 만났잖아요. 그날 친구들이 만원을 들고 오라고 했었거든요. 친구들은 다 만원을 들고 나왔는데 저는 어차피 용돈카드에 만원이 들어있으니까 그냥 나갔어요. 그날 문구점을 갔는데 상준이가 가지고 싶은 샤프가 만원이 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돈을 보태줬거든요"

"그래? 얼마를 보태줬는데~?"

"만원이요.."

"만원이나~? 만원을 다 준거야?"

"네.. 근데요. 그때는 정말 괜찮았었거든요. 친구가 돈이 모자라니까 보태준 건데..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었거든요? 근데 생각해 보니 그 돈이 너무 아까워요"

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달랠 말을 생각했다.



"음... 지온아.. 음.. 엄마 생각에는 그 돈을 다시 돌려달라고 말하기엔 좀 그럴 것 같아"

엄마의 냉정한 한마디에 실망이 일렁이는 딸의 눈은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려 했다.

"근데 지온아~이런 일은 어른들한테도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어른들끼리 밥을 먹으러 갔어. 그날따라 친구들이 한턱 쏘라고 하고 나도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얘들아~이건 내가 쏠게'

하고 크게 한턱을 냈다고 치자. 근데 그게 본인 예상보다 돈이 너무너무 많이 나간 거야~ 그럼 어른들도 다음날 아 내가 괜한 짓을 했나? 하고 후회하곤 해"

"그래요?"

아이가 살짝 누그러진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그럼~그런 일이 살면서 굉장히 많아. 그건 왜 그런 거냐면 분위기에 휩쓸린 거야.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서 올바른 판단을 못한 거야.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옆에서 분위기를 몰아가거나 상황이 곤란하거나, 눈치가 보이면 어쩔 수 없이 동참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 그래서 결정을 할 때는 꼭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지 잘 생각해봐야 해"

"네"

"생각해 봐 ~ 너희들에게 만원은 어른들로 따지면 거의 오만 원 정도의 가치일 텐데 너한테 만원이 얼마나 큰돈이겠어!? 만원은.. 음.. 엄마가 다시 줄게. 대신 지온이가 다음번에는 분위기나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정말 굉장히 큰 교훈이야."


어른들도 같은 실수를 한다는 말에 위로받고 돈을 다시 돌려준다는 말에 안심한 지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그쳤다.


"이 일로 네가 한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과 분위기에 휩쓸려 후회할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엄마는 정말 기꺼이 만원을 줄 수 있어. 근데 이건 며칠짜리 고민이었어?"

"이틀이요"

"다행이다^^ 길지 않아서.. 그리고 나중에 상준이랑 슈퍼나 문방구 갔을 때 내가 저번에 만원 보태줬었으니 아이스크림이나 뭐 조그만 거 한 두 개쯤 사달라고 말 꺼내도 충분히 괜찮아"



애프터서비스 조언까지 마치고 바로 안방으로 가서 만원을 꺼내 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돌아나가 홀가분한 얼굴로 세수를 하고 핫팩을 챙겨 씩씩하게 학교를 갔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딸은 어릴 때부터 거절하는 법을 따로 가르칠 정도로 유약한 심성의 아이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 아이가 말 못 할 깊은 고민에 빠져 혼자 고민하고 속상해하는 법이 없길 바랐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에게 제일 먼저 말하라고, '엄마의 모든 선택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결해 보자' 이야기했어도 혼자 끙끙 앓다가 끝내 터진 울음으로 쏟아내는 걱정과 고민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날들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고민을 말할 땐 아이가 답을 찾아 혼자 헤매는 시간이 길지를 않았기를 바라며.. 항상 물어보는 말이 있다.


"이건 며칠짜리 고민이었어?" 


이번엔 값은 만 원어치, 시간은 이틀짜리의 고민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과 크지 않은 금액의 돈으로 아이의 인생에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려 판단력이 흐려지지 말자"라는 훈화를 주었으니 이 얼마나 싸게 먹힌 인생교훈인가. 본디 사람은 돈을 잃어봐야 더 크게 마음에 와닿는 법이다.


딸은 오늘 그렇게 만 원짜리 인생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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