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연애편지

봄바람이 살랑살랑

by 홍은경


아내의 화장대 서랍에서 연애편지를 발견한 순간 김은 요즘 들어 부쩍 이상했던 아내의 말과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아내는 설거지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어디 외출한 것도 아니라면서 곱게 화장하고 있다거나, 하루가 멀다고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자신에게 전에 없이 살갑고 다정하게 굴어서 김을 의아하게 만들던 터였다.


김은 아내에게 무슨 봄바람이 불어 저러나, 며칠 지나면 저러다 말겠지 하고 가볍게 넘기곤 했다. 사실 술 안 마시면 사회생활 못 하느냐고 따지고 드는 것보다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와 집안일에 지쳐버린 아줌마 티를 팍팍 내는 것보다는, 뭐라도 찍어 바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훨씬 보기가 좋기는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 연애편지의 주인공을 위한 것이었다니! 김의 몸은 부르르 떨렸다.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술 탓인지 속도 몹시 쓰렸다. 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분 같아서야 당장 연애편지를 구겨 아내의 면상으로 집어던지고 싶지만, 왠지 겁이 났다.


저 여자가 정말로 날 배신하는 걸까? 갑자기 애들 생각이 나서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급기야 부서 회의 때 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부장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해 한 소리 듣기까지 했다.


김은 퇴근하자 곧바로 집으로 갔다. 문을 열어주는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우 놀랐다. 오늘은 술도 안 마시고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왔느냐고, 일찍 들어올 거면 미리 전화라도 해주지 그랬냐, 오늘따라 찬거리가 똑떨어졌는데 이를 어째, 하며 아내는 호들갑을 떨어댔다. 김은 외출복 차림의 아내를 곁눈질로 훑어보고, 내가 내 집에 들어오는데 무슨 보고냐고 소리쳤다. 물론 속으로만.


“어디 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걸 간신히 눌러 참고 묻자 아내는 생글생글 웃으며 “가긴 어딜 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당신이 일찍 들어오는 날도 있고. 마트에나 갔다 와야지.”하고 주워섬겼다. 생글생글 웃는 저 가증스러운 모습이라니!


사랑하면 예뻐진다더니 아내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부 우울증이라던 것도 말끔히 사라진 것 같고, 오히려 스무 살 여자아이처럼 명랑하고 발랄하기까지 했다. 짜증과 바가지가 사라진 아내의 모습을 남편으로서 당당히 반겨야 했으나 김은 그런 아내가 뻔뻔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아내가 언제 그놈과 만나고 돌아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모님이 편찮으시다는 핑계로 조퇴하고 불시에 급습해도 아내는 집에 있었고, 사무실에서 수시로 집 전화를 걸어도 아내가 받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럴수록 김의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리고 화장대 서랍에도 일주일에 한 통씩 연애편지가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은 아내가 작은방에서 몰래 비밀 전화를 하고 나오는 걸 목격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남편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바로 옆에서 다른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아내라니. 김은 아내의 화장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편지를 움켜쥐고 뛰어나왔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어머나 당신! 그 편지…….”


김이 편지에 적혀 있는 그 글귀를 분노를 꾹꾹 눌러 삼켜가면서 읽어 내려가자 아내는 몹시 놀랐다. 아내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김의 마음은 더없이 차갑게 굳어졌고 입가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뭐 이걸로 놀라시나? 더해 볼까?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비참한 마음과 분노에 휩싸여 간신히 편지를 읽은 뒤 아내를 본 순간, 김은 어안이 벙벙했다. 두 손을 싹싹 빌고 있어야 할 아내가 활짝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거 기억하고 있었구나! 난 당신이 다 잊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당신, 아직도 그때 그 편지 쓰던 그 마음이란 거지? 아이, 서비스 신청하길 잘했네.”

아내는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인터넷에 보니까 있더라고. 연애편지 대필해 주는 데가. 내가 당신 편지 다 갖다주고 그대로 베껴서 보내달라구 했거든. 사실 당신이 회사일 핑계로 나한테 소홀했듯이 나두 애들 핑계 대고 당신한테 소홀했어. 당신이 우리 먹여 살리겠다고 뼈 빠지게 일하는 거 난들 왜 모르겠어. 살다 보니 어쩌다 이렇게."

"……."


"우리 연애할 때 생각나? 그때 참 좋았잖아. 당신이 그 시 보내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당신 모를 거야. 그래서 당신이 나한테 보냈던 편지를 다시 받으면 그 감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싶었어. 당신이 직접 써서 보내주면 더 좋겠지만.”


김은 자신이 아내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리고 사는 데 쫓겨 아내를 사랑하는 일도 잊고 있었음을. 아, 사는 게 뭐라고 사랑하는 것도 다 까먹나. 김은 그 무안함을 무마하려고 일부러 큰소리로 껄껄 웃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끝>




*황동규 [즐거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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