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초, 종강을 한 달 앞두고 덜컥 휴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병으로 고생한 나에게 하나의 상처가 늘었다. 새로운 병명을 얻고 나서 생긴 작은 생채기는 서서히 깊어졌고, 그렇게 내 마음을 갈랐다.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렇게 대학교를 떠나 잠시 고향에 머물렀다. 삶과 세상에 대해 고찰하며 하나하나에 의미를 매겼다. 살아가기 위해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쌓인 질문은 단단한 삶의 기반이 되어 내게 용기를 주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내 삶을 찬찬히 둘러보고 마주할 희망을 주었다.
왜를 계속하면 내가 된다.
이 문장이 구석에 박힌 나를 세상으로 꺼내주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아프지?"라는 신을 원망하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답이 있다고 여기면 세상에 당도한 나라는 존재는 아파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 된다. 아파야 하는 사람은 없기에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다음부터 답이 없는 질문에는 반문하지 않았고, 답이 있다고 여기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에게는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삶의 목적이 있어야지만 살 수 있을까?", "공부는 나에게 중요한가?" 등 고등학교 시절 외면한 중요한 질문도 던졌다.
그중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아픔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방식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앞으로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바꿜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느끼는 저릿저릿한 긴장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유독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금방 찾지 못했다.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픔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픔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면 "왜 나만!"이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내적으로 생겨난 그 부당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삶을 진찰하며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답을 찾기 위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세상의 부당함과 배신을 이겨낼 용기를 스스로 얻고 싶었다.
그렇게 덜컥 휴학했고, 새로운 경험을 저질렀다. 경험 속에서 느껴지는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집중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서서히 '내'가 '나'여야만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버리며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새가 되었다.
이제부터 살펴볼 이야기는 인간이 아픔을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었던, 조용하지만 치열함이 공존하는 세계의 외침이다. 하나의 외침의 마디가 되는 여러 운율을 즐기는 이에게 감사를 표하며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