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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Jan 10. 2020

아이의 감정도 옳다

육아 에세이. <당신이 옳다>를 읽고 감정을 받아주고 공감해 보니

#1
둘째 아들(4살) : 아.. 빠... 아.. 빠... (울먹울먹)
아빠 : 예람아, 누나가 예람이 장난감 가져가서 속상했어?
둘째 : (끄덕끄덕)
아빠 : 그래서 속상했구나, 화도 나?
둘째 : (끄덕끄덕)
아빠 : 화가 많이 나? 얼마나 많이 나? 누나 엄청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니?
둘째 : (도리도리)
아빠 : 그 정도는 아니야? 아이고, 우리 둘째가 화가 많이 났구나. 그랬구나.(더 꽉 안아준다.)
첫째 딸(6살) :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아빠는 참 착한 아빠구나?
둘째 : (아빠 품에 있다가 내려와서 다시 누나랑 논다.)


첫째가 나의 무엇을 보고 갑자기 ‘착한 아빠’라고 나름 평가한 걸까?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때 당시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를 한창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감정에 집중하는 공감의 중요성에 연신 동의하면서 꼭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마침 기회가 왔다.


위의 상황에서 나는 둘째의 울먹거림에 대체로 “울지 마, 뚝!”하거나 “왜 화났어? 누나가 그럴 수도 있지.”하거나 “하랑아, 그거 동생 다시 조금만 갖고 놀게 다시 줘!”, 뭐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정에 집중해 보자’는 목표로 둘째와 차근차근 대화를 시도했다. “왜”라는 것에 집착하여 원인을 파악하거나 상황을 빠르게 종결하려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먼저 둘째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이고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 보려고 애썼다.(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중간중간 말문이 막히기도 했지만.)


둘째는 아빠가 자기감정에 집중해주자 울먹거림이 많이 줄어들면서 안정감을 되찾았다. 둘째가 실제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 정도를 정확하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둘째의 그 감정을 인정해 주고 끌어안아주니 대성통곡하려고 했던 둘째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첫째의 마음을 무언가 건드린 것은 아닐까? 첫째의 ‘착한 아빠’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내 주관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럴 것 같다.


“아빠는 우리의 감정에 집중해 주는 아빠구나.”



정혜신 작가는 <당신이 옳다>에서 감정과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을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중략)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중략)
그때 내가 아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공감이 아닌가. 공감이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너는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고 아이의 그 마음을 받아 안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아이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감이다.
모든 인간은 각각 개별적 존재, 모두가 서로 다른 유일한 존재들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다르다. 그러므로 공감한다는 것은 네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공감적 태도가 공감이다. 그 태도는 상대방을 안전하게 느끼게 하고 믿게 하고 자기 마음을 더 열게 만든다.
 <출처 : 당신이 옳다 | 정혜신 저>


난 이제까지 감정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것이라 사람을 상대할 때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오히려 감정이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고유한 것이라니, 실로 내 사고의 틀을 깨는 내용이었다. 감정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그동안 노력해왔던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날 때 그들이 처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이성적인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좋은 선생님이 될 줄 알았다. 상황에 맞춰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명석하고 지혜로운 선생님, 단번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명철한 선생님, 정말 멋지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그 만남에서 학생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거나 그것에 집중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상담을 마치고 나가는 학생들이 뭔가 납득했다는, 그러나 후련하지 않은 표정을 자주 보였다. 아마도 그건 이성적인 방법은 이해했지만 문제 속 감정은 이해받지 못하여 홀로 그 감정을 다시 떠안게 됨에 답답하고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만났던 제자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몸을 쓰면서 잘 놀아주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언어로 온기를 나누는 삶은 부족했다. 어린아이들인지라 순수하게 즉흥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때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 표현을 싹둑 잘라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얘들이 왜 이렇게 울거나 화내는지 이해가 안 되니 나도 그냥 짧게 끊어버리곤 했다. 앞으로도 그런 단절감을 우리 아이들에게 계속 느끼게 하여 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된 후 소통이 막힌다면, 그것은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바로 나의 책임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임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2 (#1의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후)
첫째 : (겨울왕국 화장품 가방을 들고) 아빠, 이것 좀 봐요. 여기 뭐가 들어있게요?
아빠 : (귀찮은 기색으로) 하랑아, 아빠 지금 힘들고 피곤하니까 저리 가서 혼자 놀아.
첫째 : (무시하며) 아빠, 여기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요?
아빠 : (짜증이 확 올라와서) 하~랑아, 아빠 좀 쉬고 싶으니까 의자에서 좀 내려와. 너 혼자 잘 놀 수 있잖아.
첫째 : 싫어! 나 아빠랑 놀 거야. 난 아빠를 사랑하니까, 아빠 옆에 있을 거야!
#3 (이후 첫째의 원아 수첩에서 발견한 담임선생님의 메시지)

하랑이가 아빠가 방학했다고, 그래서 아빠랑 더 많이 놀 수 있어서 좋다고 신나 하네요.


이런 아빠가 뭐가 좋다고 우리 첫째는 아빠 주위를 계속 맴돈다. 마치 인공위성처럼. 요즘엔 둘째도 합세해서 틈만 나면 달려든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공감해 주면 친밀감이 더욱 깊게 쌓이는 것 같다. 거창하게 여행을 가거나 비싼 선물을 사주거나 하지 않아도, 사소할 수 있는 일상에서 감정을 존중해주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아빠로서 잘 먹힌다. 그렇게 진실한 부모의 사랑을 먹으면 또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몸도, 마음도 부쩍부쩍 커간다. 그리고 그 성장을 지켜보는 것 또한 아빠로서 즐거움이자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행복이다.




김민식 작가가 <매일 아침 써봤니?>에서 한 말이 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감정에 주목하고 인정해 주고 공감하는 것. 그것이 자녀를 양육하면서 부모의 행복감, 아이의 행복감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행위의 빈도를 높여 나는 아빠로서 오늘 하루도 더 행복해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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