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들의 상처가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

by 박은석


크게 다쳤던 곳에는 흉터가 남는다.

흉터는 과거에 이곳에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쳤던 곳이니까 조심하라고 알려준다.

전에 다쳤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렇게 다치지 말라고 알려준다.

몸에만 흉터가 있는 것이 아니다.

1년 365일 중에서도 크게 다쳤던 날들이 있다.

그날의 상처는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1910년 8월 29일은 일본 제국주의 힘에 눌려서 우리의 주권을 상실한 날이다.

너무나 부끄러운 날이라고 해서 국치일(國恥日)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양우조, 최선화 부부가 쓴 육아일기인 <제시의 일기>를 보면 해마다 8월 29일이면 임시정부 요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비장한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다시는 우리 역사에 이런 부끄러운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자는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가르침을 그들은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였다.




1년 365일 중에서도 흉터처럼 딱지가 앉아 있는 날, 피부색이 바래버린 것처럼 티가 나는 날이 있다.

몇 년 전부터 나도 그날이 오면 나만의 어떤 의식을 치른다.

그날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 하고, 그날의 함성을 조금이라도 들어보려고 한다.

물론 그날의 그 현장으로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그날에 대한 정황을 잘 표현해주는 책을 찾아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백분의 일이라도 천분의 일이라도 그 아픔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 함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에게 아픔으로 다가오고 함성으로 다가오는 그날은 바로 삼일절과 광복절이다.

이 두 날은 26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만 ‘만세’ 소리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만세’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34년 11개월 동안 우리는 ‘만세’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세는 철저한 금지어였다.




‘만세’라는 말만 하지 못했던 게 아니다.

영이, 순이, 철수, 영철이의 이름도 부를 수 없었다.

김씨 아저씨, 박씨 아저씨의 성씨도 부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갸거겨’로 시작하는 한글도 배울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어렸을 적에는 매일 아침마다 동쪽을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일본말로 뭐라고 뭐라고 하셨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습관처럼 몸에 밴 그 의식은 쉽게 잊히지 않으셨던 것 같다.

깊이 새겨진 상처이기 때문이다.

흉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상처가 나서 딱지가 앉으면 가만히 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딱지를 일부러 살짝 들어보곤 했다.

상처가 덧날 게 뻔한데 그 상처가 어떤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버릇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이 아팠던 날 삼일절이 되면 그 상처를 살짝 들춰본다.

광복절이 되면 다시 한번 들춰본다.

그리고 상처가 덧나듯이 나도 아파한다.




1948년 3월에 백범 김구 선생이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라는 누명으로 미군정의 군사재판에 소환되었다.

법정에 선 김구 선생에게 검사가 물었다.

“직업은 무엇이오?”

그 질문에 김구 선생의 대답은 짧고 굵었다.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이 한마디 문장을 읽는데 피가 끓어올랐다. 눈이 시렸다.

‘독립운동’이라는 네 글자에 서린 아픔과 상처와 눈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이라는 한 단어를 위해서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내던진 인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독립을 이룰 수 있는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독립된 세상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죽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그 뒤를 이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독립된 하늘 아래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상처가 흉터처럼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

대한사람의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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