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도교 경전 중의 한 권인 <장자(莊子)>는 재미있는 비유로 시작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 물고기가 어느 날 큰 새로 변했다.
사람들은 그 새를 붕(鵬)이라고 불렀다.
붕새가 날개를 뻗으면 그 길이가 3천 리나 되었다.
그래서 이 새가 날개를 펼치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에 구름이 드리운 것 같았다.
붕새는 한 번 날아오르면 9만 리를 갔고 6개월이 걸렸다.
그 정도를 간 후에야 붕새는 비로소 쉬었다고 한다.
그런데 붕새는 아무 때나 날아오르지 않았다.
바다 위에 태풍이 거세졌을 때에야 비로소 날개를 펼쳤다.
3천 리나 되는 날개로 수면을 치면 거기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
그러면 붕새는 그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아지랑이나 먼지 같은 것은 작은 생물의 숨결에도 날리지만 붕새가 날아가려면 그만큼의 힘이 필요했다.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켜야만 붕새가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매미와 작은 새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바람이 없어도 저기 느릅나무나 박달나무가 있는 곳으로 재빠르게 날아갈 수 있어.
물론 어떤 때는 높은 나무에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지.
그렇지만 굳이 구만 리까지 날아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매미와 작은 새는 자신들이 붕새처럼 바람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뿌듯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붕새처럼 멀리 가려면 준비할 게 많다.
가까운 곳에 가는 것이라면 숨 한 번 참고 다녀오면 되겠지만 석 달 동안 가야 하는 거리라면 석 달 치의 양식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붕새가 날갯짓을 하면서 회오리바람을 만드는 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매미는 그 일이 우습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붕새에게 그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매미가 붕새의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이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매미가 어찌 붕새의 마음을 알리요?’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큰 뜻을 지닌 사람이 있는데 소인배가 어찌 그 위인의 마음을 알겠는가라는 식이었다.
이런 교훈이 먹혀들었던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남들과 비교하는 비교 의식이 팽배하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붕새가 큼지막한 새이니까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는 게 많을 것이라는 가르침도 있었다.
그런데 매미와 붕새를 단순하게 비교하지 말고 매미는 매미의 삶으로, 붕새는 붕새의 삶으로 각기 나눠서 생각해 보면 의외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매미는 가까운 거리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녀도 충분하다.
하지만 붕새는 날개의 길이만 해도 3천 리나 나가기 때문에 적어도 한 번 날아오르면 3천 리를 넘게 날아야 한다.
제자리에서 날갯짓만 해도 3천 리에 뻗치기 때문이다.
붕새는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한 번 날아오르면 3천 리 이상을 날아야 한다.
큰 새가 좋은 새인가? 멀리 날아가는 새가 좋은 새인가?
우리는 은연중에 큰 새가 좋은 새이고 멀리 날아가는 새가 좋은 새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너나없이 붕새처럼 큰 새가 되려고 노력을 한다.
하지만 매미가 붕새가 될 수는 없다.
아니, 매미가 붕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붕새는 9만 리를 날아가야 하는 사명을 가졌고 매미는 요 앞에까지만 날아가도 괜찮은 사명을 가진 것이다.
각자 자기 사명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
멀리 날지 못한다고 매미를 타박해서는 안 된다.
매미는 매미가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면 된다.
반면에 붕새에게 요 앞에 있는 나뭇가지에까지 갔다 오라고 하면 붕새는 그 일을 절대로 완수하지 못한다.
붕새의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붕새는 멀리 가도록 창조되었고, 매미는 가까운 곳을 드나들도록 창조되었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우리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