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생활 4년을 종로구 부암동에서 지냈다.
일찍 결혼해서 서울살이를 하고 있던 둘째 누나네가 그 동네에 있었다.
청와대 뒤편에 자리한 그 동네는 오월이면 아카시아 꽃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곳이었다.
경복고등학교 뒷길에서 인왕산 스카이웨이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한양성 4소문 중의 하나인 자하문(紫霞門)이 자리하고 있다.
고개를 들어 보면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개를 내려다보면 언덕 아래의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 좋은 동네이다.
가끔 그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걸어서 내려오기도 했는데 청운동까지 가는 길은 언제나 고즈넉했다.
그러다가 청운동을 지날 때쯤이면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그중에는 하얀 지팡이를 땅바닥에 두드리며 걷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연신 손놀림을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울맹학교, 서울농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이었다.
스무 살, 한창 젊음을 발산하던 때였던 나는 그들이 안쓰럽고 불쌍하게만 보였다.
눈이 안 보이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귀가 안 들리는데 어떻게 살아갈까?
말을 못 하는데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을 보면서 내 맘 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나마 귀가 안 들리는 이들은 눈이 안 보이는 이들보다 좀 더 나아 보였다.
입 꾹 다물고 있으면 그가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인지 겉으로는 티가 안 난다.
수화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고 입 모양을 보면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챌 수도 있다.
그에 비하면 눈이 안 보이는 이들은 단박에 그 사람이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얀 지팡이를 짚어가면서 길을 걷는 그들이 신기해 보였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면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얼마나 많이 다시 일어나야 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마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넘어졌을 것이다.
애써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
관심을 가지면 불쌍해지고 불쌍한 마음이 들면 뭐라도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괜한 동정을 표하는 것은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고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면 될 뿐이었다.
그들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방향으로 걷다 보니 그들이나 나나 똑같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몸의 불편함이 있지만 그들도 나처럼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가고 있었고 젊고 꿈 많은 청춘들이었다.
그들이 나보다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헬렌 켈러나, 전설적인 재즈 가수인 레이 찰스, 미국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강영우 박사 같은 인물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고 깨닫게 되었다.
비록 눈이 안 보이더라도 충분히 지식을 쌓을 수 있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세상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데는 점자의 발명이 큰 몫을 차지했다.
사실 점자는 1808년에 프랑스 군대에서 암호문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개발되었다.
어두운 밤에 손가락의 촉각만으로 암호를 해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메시지를 손가락으로 해독하는 이 방법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배우기도 어렵고 읽고 쓰기도 어려웠다.
당시 파리 맹학원에 다니던 16살의 시각장애인 루이 브라유(Luis Braill)는 기존의 점자 대신에 새로운 점자를 개발하였다.
단 6개의 점만 배우고 나면 어떤 글도 쓰고 읽을 수 있는 점자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브라유의 고향 마을광장에 세워진 그의 동상 앞에는
“이 분은 앞을 볼 수 없는 모든 이들에게 지식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브라유는 세상에 또 하나의 빛을 던져준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