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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pr 24. 2023

약해 보이는 개개인이 실은 중요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장기를 참 잘 두셨다.

내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 동네 어른들과 장기를 두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아주 여유 있고 자신만만한 얼굴 표정이셨다.

어떤 때는 장기 두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몇 마디 훈수를 하실 때도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장기판에 훨씬 잘 보이는지 아버지의 훈수는 정확했고 아버지의 훈수대로 장기를 두면 이겼다.

나도 친구들과 어울려 장기 두는 법을 조금 배웠다.

어느 정도 실력이 붙었다고 생각했을 때 감히 아버지에게 도전을 했다.

아버지는 어른이 아이를 상대하는 것이니까 ‘마’도 하나 빼고 ‘상’도 하나 빼고 ‘차’와 ‘포’도 하나씩 빼셨다.

절반의 병사들로 내 공격을 막아내셨고 왕을 지키셨다.

그러다가 언제 날아왔는지 나의 왕을 와락 잡아가셨다.

분명히 내가 가진 말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말들이 많다고 해서 장기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병사가 많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 초보자인 나는 ‘차’를 주 공격무기로 사용했다.

‘차’는 정말 편하다.

장기판에 그어진 선을 따라 고속도로로 달려가서 적군을 치면 된다.

혹시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을 때는 ‘포’를 이용해서 장애물을 뛰어넘어 적진으로 들어간다.

정말 용감무쌍하게 전장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차’나 ‘포’보다는 ‘마’와 ‘상’을 잘 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졸’도 무척 중요하다고 하셨다.

나는 ‘차’, ‘포’, ‘마’, ‘상’, ‘졸’ 순으로 병력을 세웠는데 아버지의 생각을 달랐다.

약한 말들이 오히려 강하다는 하셨다.

장기의 고수들은 졸(卒)만 있어도 이긴다고 하셨다.

졸은 차(車)처럼 여러 칸을 앞뒤 양옆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포(包)처럼 뛰어넘을 수도 없다.

마(馬)나 상(象)처럼 두세 칸을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번에 한 칸밖에 움직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졸은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무조건 돌격이다.




차, 포, 마, 상과 같은 장군들은 큰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상대방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전쟁에서도 장수가 죽으면 병졸들은 오합지졸이 된다.

그러니 상대방의 장수들을 먼저 공경할 수밖에 없다.

차, 포, 마, 상을 잃으면 장기판을 거둬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이때 졸의 진가가 발휘된다.

비록 한 칸씩이지만 옆에 있는 졸과 보조를 맞추면서 앞으로, 그리고 옆으로 계속 가다 보면 상대방의 왕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렇게 졸을 가지고 장기판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민중혁명들은 장기판의 졸과 같은 백성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평상시 같으면 아무 힘도 없는 나약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백성들은 서로 힘을 모아 거대한 절대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1789년에 일어났던 프랑스혁명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전쟁에서는 기막힌 전략과 전술도 필요하고 최신의 무기도 필요하며 많은 병력도 필요하다.

비행기에서 폭격을 하고 먼 거리에서 미사일과 대포를 쏘면 승기를 잡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제아무리 가공할만한 공격을 퍼붓더라도 개개의 병사들이 시가지에 들어가서 땅을 점령해야 전쟁이 끝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에 엄청난 폭격을 가했지만 그 땅을 점령하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 지났을 때 독일군 40만 명을 비롯해서 추축국 군인 80만 명가량이 희생되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조그마한 소총 하나 들고 수류탄 몇 개 챙긴 병사들의 모습을 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가서 발로 밟는 땅만 아군이 얻게 되는 땅이다.

약한 존재인 것 같지만 그들이 큰일을 이룬다.

장기에서 졸이 중요하듯 세상살이에서도 약해 보이는 개개인이 실은 중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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