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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공감해 주는 또 한 사람이 필요하다

by 박은석


억울한 사연이 있다는 분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냥 안부 인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의 사연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는지 마침 전화를 걸어준 나에게 몇 개월 전에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털어놓았다.

잠깐 목소리만 확인하고 끊을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전화를 끊으면 내가 굉장히 나쁜 놈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와줄 방법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니까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그가 억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정말 그에게 잘못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예, 예.

정말 억울한 일이네요.

그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라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는 것밖에 없었다.

30분 정도 통화를 했더니 그도 기력이 다했는지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비로소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누가 잘못을 했는지는 따져봐야 알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했던 일은 고작 몇 마디 말을 반복하면서 맞장구를 쳐줬을 뿐인데 그는 내가 자신의 마음에 굉장히 공감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하루 24시간 중에서 30분 정도의 시간을 그에게 할애했다.

엄청난 투자를 한 것이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하루 30분의 시간을 할애할 만큼 내가 자신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오늘의 전화 통화가 있기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을 얘기할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끙끙거리며 속병만 앓고 있었는데 나에게 다 털어놓고 나니까 속이 후련해졌다고 한다.

나중에 만나면 나에게 밥 한 끼 사준다고 했다.




30분 전에는 시들시들 시들어가던 사람이었는데 30분이 지난 후에는 생기발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꿔놓았을까? 내가 그를 바꾼 것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를 바꾼 것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공감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공감에 대한 믿음이 그를 바꾼 것이다.

이런 일은 우리 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그 엄청난 한마디의 말은 아마 공감하는 말일 것이다.

세상은 변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 편이라는 느낌을 심어주면 천 냥 빚도 탕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그 외로움이 사람을 절망하게 만든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름 아닌 이 외로움으로 인한 ‘절망’이다.






<사피엔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가 다른 여러 종족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로 ‘뒷담화’를 꼽았다.

사피엔스족은 수다스럽다는 것이다.

둘 이상이 모이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정보가 쌓이고 그 정보력을 바탕으로 해서 강력한 힘을 구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유발 하라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서 사피엔스족은 상대방에게 공감을 많이 하는 족속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내가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기에 그도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옷도 있어야 하고 먹을 것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나를 공감해주는 또 하나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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