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색깔이 없듯이 사람도 색깔이 없다

by 박은석


서해바다를 보았다.

누리끼리했다.

바닷물이 아니라 흙탕물 같았다.

처음 서해바다를 보았을 때는 이게 바닷물 맞나 싶었다.

내 고향 제주도의 바다는 파랬다.

어떤 때는 초록 바다였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다다를 즈음에 창밖을 내다보면 제주 바다가 어떤 바다인지 알 수 있다.

아마 그 바다 색깔에 취해서 제주도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스무 살이 되어 제주도를 떠나기 전까지 나는 그런 바다를 보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바다가 무슨 색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란색이고 초록색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서해바다를 가 보았더니 누런 바다였다.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바다가 아니었다.

동해바다나 남해바다는 물이 들어오고 나갈 때 숨통이 트이는데 서해바다는 숨통이 막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물이 나가는 곳에 갯벌이 생기고 그 갯벌 위로 물이 다시 들어오니 물이 흙을 품고 있어서 누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물은 색깔이 없다.

냄새도 없다.

무색무취이다.

두 손으로 서해바다의 물을 떠 보면 물을 누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 흙먼지임을 알 수 있다.

물이 누런 게 아니다 흙이 물을 누렇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물에 물감을 풀면 물 색깔이 알록달록하게 보인다.

하지만 속지 말아야 한다.

물이 알록달록한 게 아니다.

그 물을 여과지로 통과시켜 보면 물과 색이 분리된다.

그때 물은 역시 색깔이 없는 맑은 물일 뿐이다.

색이 물을 바꾸려고 해도 물은 바뀌지 않는다.

바다가 파랗게 보이는 것은 물이 파란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플랑크톤과 해조류와 먼지들이 파란 물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다가 초록색으로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바닷물은 원래부터 색깔이 없다.

그러니 바다가 파랗다느니 바다가 초록빛깔이라느니 바다가 누렇다느니 하는 말로 바다를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바다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바다가 원래 색깔이 없듯이 사람도 원래 색깔이 없다.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라며 색깔을 씌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람을 제대로 모르는 말이다.

그 짧은 한 단어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내가 20년 동안 제주도에서 살았다고 해서 나를 제주도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웃긴 얘기다.

내 주민등록증을 보면 나는 제주도 사람이 아니라 경기도 성남시 사람이다.

선거 때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제주도에 투표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 주민센터에 가서 우리 동네에 출마한 사람에게 투표한다.

나는 제주도 사람이 아니다.

단지 제주도 출신의 사람일 뿐이고 지금은 경기도에 살고 있으니까 경기도 사람이다.

이처럼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부르는 말이 달라진다.

산에 있으면 산 사람이고 들에 있으면 들 사람이며 바다에 있으면 바다 사람이 된다.

환경이 사람을 바꾸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색깔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바닷물이 물일 뿐이듯이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 사람을 이렇게도 보이게 하고 저렇게도 보이게 한다.

그뿐이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평가하면서 살아왔다.

내 눈에 보이는 색깔대로 사람들에게 색깔을 씌우며 살아왔다.

그 사람에게 다른 모습이 보이면, 다른 색깔이 보이면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그런 색깔의 사람인 게 아니라 내 눈이 색안경을 끼고 있어서 그 사람을 그런 색깔로 본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때 나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이 색깔이 없듯이 사람도 색깔이 없다.

없는 색깔을 만들어 내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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